2020년 가을의 끝자락에서, 베토벤이 울려 퍼졌다. 섬세하면서도 무게감 있고, 열정이 가득하면서도 동시에 여유가 넘치는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의 연주는 거리두기로 띄어 앉아 있던 관객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기에 충분했다. 이성주는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1977년 뉴욕 카프만홀에서 데뷔한 이후 세계를 순회하며 연주하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1994년 한예종 개교 초기부터 함께하며 수많은 제자를 연주자로 성장시킨 스승이기도 했다.

처음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바이올린을 시작한 계기는 부모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어머니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좋아하셨고, 아버지 역시 프로는 아니지만 성악을 오래 공부하셨고요. 다섯 남매 중 막내인 제가 결국 대물림을 받았죠. 제가 어머니의 꿈을 이루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열세 살에 유학을 갔는데, 그 어린 나이에 해외에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죠. 그런데도 아버지가 좋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가가 되려면 더 넓은 곳에서 배워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셔서 일찍이 유학길을 틔워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바이올린은 저의 동반자입니다. 음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당시 유학에 오르는 길은 고생스러웠으니까요. 그 순간에 큰 결심을 한 것 같아요. 포기하지 않고 바이올리니스트로 평생을 살아가겠다는.

동양인 소녀가 마주했던 미국
제가 1969년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처음 석 달 정도 살았던 곳이 인디애나 주의 조그마한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에 동양인이 많지 않았으니 학교나 백화점에 가면 사람들이 저를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일종의 구경거리였어요. 그후 뉴욕으로 갔는데, 뉴욕은 다른 곳보다는 이민자들이 많으니 조금 나아지긴 했죠. 그런데도 (서양에서) 동양인으로 살아가는 게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그 당시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게 거의 80년대까지 이어졌는데 어디를 가더라도 동양인 그리고 여자로 연주 여행을 다니는 건 힘든 일이었죠. 그런데도 굉장히 재밌기도 했어요. 오히려 미국에서 오래 거주했으니 영어를 현지인처럼 말하면 상대측에서 놀라는 거죠. 연주 차 시골에 가면 코리아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알려 드리기도 한 기억들이 인상에 남네요.

설산을 넘게 한 연주에 대한 열정
제가 해외에서 연주 생활을 하며 산속에서 죽을 뻔한 경험이 있어요. 덴버에서 와이오밍으로 가던 중에 눈이 와서 비행기가 결항하였죠. 눈이 너무 와서 앞이 안 보일 정도였는데 제가 운전을 해서 연주 장소에 가겠다고 차를 빌렸죠.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산을 넘었더라고요. 한 30분이면 갈 거리를 대여섯 시간동안 서행해서 갔거든요. 도착해서 아침에 산을 보고 저도 놀랐죠. 이건 하나님이 지켜준 여행이라고. 막상 갈 때는 겁 없이, 음악회를 시간 내에 가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제 반주자를 데리고 산을 넘은 건데,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죠.

연주한다는 것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
연주는 긴 시간 실수 없이 쭉 나간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긴장감이 있죠. 하지만 레코딩은 섬세하게 여러 번을 하더라도 한 테이크가 완벽하면 돼요. 그런데도 또 흐름을 잘 타려면 곡을 충분히 소화한 다음에 녹음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피아니스트나 오케스트라와의 조합 역시 중요하고요. 연주와 녹음은 아주 다른 경험이지만 그래도 연주가 먼저인 거 같아요. 연주한 후에 곡이 잘 다듬어지면, 그다음에 녹음이 있는 거죠. 녹음은 영원히 남는 결과물이니 그걸 통해서 제 음악 속에 철학이 담기도록 노력합니다.

1986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며
참으로 어려운 작곡가라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음악에 대한 베토벤의 철학을 이해하고 연주로 만들어 낸다는 건 너무나도 힘이 드는 일입니다. 관중들에게 어렵게 들리면 안 되니까요. 듣기 좋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하고요. 그런 점들을 다시 파악해가면서 공부한 것이 또 하나의 도전이었죠. 베토벤을 알아야 음악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지 않을까 싶어요. 고전적이면서도 낭만적이고, 또 굉장히 괴팍한 성격도 지닌 음악이기 때문에 그런 걸 연주에 잘 녹여서 표현한다는 게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토벤이 좋으면서도 때로 싫기도 하고, 그런데도 연주는 해야만 하는 것 같아요.

이성주가 함께 걸어온 사람들, 스승과 동료
저의 스승들은 크게 네 분입니다. 몇 달 전 작고하신 고(故) 김용윤 선생님이 처음 저를 가꿔 주셨죠. 또 이반 갈라미안 선생님, 도로시 딜레이 선생님, 그리고 미국에서 잠깐 함께 살았던 마거릿 파디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분들이 저에게는 모두 좋은 경험이었죠.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을 거예요. 특히 그중에서도 딜레이 선생님은 바이올린만 가르치신 게 아니라 저와 대화를 아주 많이 나눴어요. 레슨 시간에 이야기만 하다가 끝난 적도 많고요. 생활이나 역사 등 다양한 지식을 갖고 계셔서 서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죠. 저에겐 참 어머니 같은 분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제가 선생님이 된다면 저런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본을 많이 받은 분입니다. 또한 솔리스트로 좋은 지휘자를 만나는 건 굉장히 영광이죠. 그래서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Vladimir Ashkenazy)와의 연주나 레너드 슬래트킨(Leonard Slatkin)과 같이 유명한 지휘자들과 연주하면서 배우는 게 참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바이올리니스트는 피아니스트가 없으면 거의 연주를 못 하죠. 학생 시절부터 함께 했던 스테판 라자루스(Stephen Lazarus)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슈만 소나타 데뷔앨범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 한국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열 곡을 하루 만에 연주한 적이 있어요. 당시 과감히 함께해보겠다고 이야기한 독일 피아니스트가 바로 올리버 케른(Oliver Kern)입니다. 그 두 피아니스트가 각별합니다. 또 우리 학교의 김대진 음악원장님하고도 처음 한국에 돌아와서 연주도 함께하고, 줄리어드 대학교 선후배이니 또 각별한 관계네요.

미국에서 한국으로의 귀국, 그리고 가르침이 있는 삶
뉴욕에서 연주가로도 활동했지만 많은 학생을 접하기도 했어요. 당시 자신의 실력이 어디쯤 있는지 모른 채 유학을 오는 학생들을 여럿 보았고 안타까운 마음이었죠. 저는 조수로 일하면서 갈라미안 선생님을 도와드리기도 했고, 그래서 언젠가 저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길로 들어서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던 중 한국에 연주를 하러 왔다가 이강숙 초대 총장님을 만나 뵙게 되었죠. 거절을 못 하게 만드시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레슨만 하고 학생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도 보았는데, 저는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기왕 레슨을 할 거라면 정말 학생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도록, 제 마음에 들도록 학생을 가르치고 싶다는 결심으로 귀국했죠.

조이 오브 스트링스, 끝나지 않는 제자들에 대한 보살핌
조이 오브 스트링스는 1997년, 제가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꾸린 현악 앙상블 그룹입니다. 당시 스승과 제자들의 음악회를 주제로 한 시리즈가 있었어요. 대부분은 2중주를 했다면 저는 학생들과 조금 더 함께하고 싶어 앙상블을 만들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학생들이 앙상블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것 같아 기회를 주고 싶었고요. 만들고 나니 반응이 좋았어요.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대학에서 학생들로 이뤄진 스트링 앙상블이 거의 없었는데 저희가 시작하고 나니 그다음부터 붐이 일었죠. 개인 레슨 때 테크닉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음악적인 얘기는 거의 못 하거든요. 그런 시간을 늘리고 싶었고, 앙상블을 통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전달하고도 싶었습니다. 지방 연주를 비롯해 여러 연주를 다니면서 학생들과 가까워지는 면이 좋더군요. 이제는 20년이 넘어 정식 프로단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모두 전문 연주가가 되었기에 동료 연주가이자 후배로서 함께 연주하고 다니는 것이 즐거워요. 조이 오브 스트링스가 대중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저희는 여러 도전을 많이 합니다. 관중들은 항상 같은 걸 원하지만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새로운 걸 배웠으면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하거든요. 20여 년 동안 프로그램 기획하는 게 힘든 일이었죠. 국악이나 아코디언 연주 등과 함께하기도 했고, 또 도미부인 설화를 바탕으로 무용, 연극 등 다양한 장르가 합쳐진 창작곡 연주도 하고 여러 경험이 많네요. 정말 어떤 연주에도 거리낌이 없고 무엇이든지 소화해내는 전문단체가 되었습니다.

2017, 2017, 1986
2003, 1995, 2012

그리고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서
우선 지금의 조이 오브 스트링스는 현악만 있지만 더 다양하게, 더 큰 규모로 넓혀 관현악단으로도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요. 또 저는 내년이면 은퇴인데 다시 연주자로서 초점을 맞추면서 못했던 연습이라 할까요 그런 시간을 주고 싶고. 그런데 우선은 조금 쉬어야죠. 음악가로서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지 그리고 또 음악가가 아닌 저를 살펴보고요. 다양한 음악 장르를 공부해보고 싶기도 해요. 사실 내년 9월에 작은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는데, 피아졸라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남미의 음악들이나 재즈풍으로 이루어진 음악회를 꾸밀 예정입니다.

한예종에서의 28년을 돌아본다면
정말 28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네요. 똑같기도 하지만 또 많은 경험이 있었고. 교수라기보다 음악가로서 계속 살았고, 살아갈 것 같아요. 퇴임 이후에도 더 많은 학생을 볼 수도 있고요. 제게 가르침은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외국에서도 활동했지만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이런 좋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해외로 진출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자부심을 느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한예종은 저에게 큰 부분을 차지하죠. 제 인생이 크게 미국과 한국에서의 생활로 나뉜다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곧 한예종이었으니까요.

이성주 교수는 12월 30일 베토벤 시리즈의 종지부를 찍을 공연을 앞두고 있다. 베토벤 ‹바이올린 콘체르토 D 장조, Op. 61›과 ‹트리플 콘체르토 C장조, Op. 56›이 연주된다. 김대진 음악원장의 지휘, 피아노 연주와 더불어 첼리스트 김민지, 그리고 조이 오브 스트링스가 ‘조이 심포니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협연을 하며 무대를 채워 줄 예정이라고 한다.

글 윤해인 사진 김경수 영상 안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