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어 주디스 버틀러는 보부아르를 지적하며 “여성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버틀러의 이론에 따르면 섹스(sex)는 없다. 그럼에도 젠더(gender)는 존재하는데, 이때 젠더는 수행적인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행위 뒤에 행위자는 없”기 때문에, 행위 이전에 구성된, 본질적이고 고정된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것의 수행성만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반복적으로 복종하며 수행하는 배우가 된다.1 허구적으로 상상되는 성적 규범을 전복시키는 드래그(drag)-젠더 패러디 행위는 부치-펨(butch-fem) 담론과 더불어 기존의 이분화된 성적 규범을 교란하면서 젠더를 횡단한다.
뮤지컬 ‹앨리스 스튜디오›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드랙퀸 앨리스가 있다. 앨리스 스튜디오에서는 지정성별 남성으로 식별되는 배우가 화려한 화장을 하고 다채로운 드레스를 입은 채 경쾌한 하이힐 소리로 우리를 맞이한다. 다소 충격적인 비주얼은 희석과 승주의 젠더 패러디 서사로 확장되는데, 승주는 아주 평범한 보통의 남편이다. 수트를 입은 아내를 거부하는, 아주 보편적인…… 트랜스젠더퀴어(transgenderqueer)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 것은 사회에서 명백한 사기 행위로 낙인찍힌다. 이성애자 남성이 사랑하지 않는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게이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히지 않고 여성과 결혼할 경우 ‘위장결혼’이 된다. 승주의 첫사랑 ‘경험’이 고백 되는 순간, 승주는 ‘사기꾼’이 된다. 로라에 대한 승주의 사랑은 인류가 믿는 보통의 ‘낭만적 사랑’이 아니다. 이때 연출은 우리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어째서 모든 사랑하는 관계는 친구나 연인으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승주의 사랑을 목격하며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상상할 수 있다. 현대의 사랑이란 아주 근대적인 개념이다. 사랑이라는 관념은 역사적으로 시시각각 변모해 왔고, 가족의 형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낭만적이고 혈연적인 친족의 형태만을 진정한 가족의 프레임으로 구상하는가?

ⓒ구로문화재단

로라의 서사는 퀴어이즘 뿐 아니라 여성의 문제 역시 가시화한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종속된 로라는 원치 않는 웨딩 드레스를 입고 ‘버진로드’를 걸으며 낭떠러지의 환영을 보지만, 사회에 떠밀려 남편과 아이와 시어머니를 기다리는 삶으로 들어간다. 노크 소리에 반응하는 로라의 넘버는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아내, 어머니, 며느리로서의 삶, 그런 로라에게 찾아온 희석의 의미는 아이러니하다. 로라는 희석이 자신의 소울메이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희석이 실은 로라의 잃어버린 딸 지희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로라는 물론이고 관객 전원은 희석과 지희가 다른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라와 희석을 가로지르는 팽팽한 정서는 다소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정신분석학적 개념인 오이디푸스 과정에서 아이는 어머니에게 최초의 사랑을 느낀다. 여기서 여아의 사랑은 어머니의 경우 동성애 금기에 의해 아버지로 이동하는데, 이때 그 사랑은 근친상간의 금기로 인해 또다시 거부된다. 이리가레는 이 연속된 박탈을 겪는 과정에서 여아가 자신이 남성기가 없다는 사실을 거세로 인식하면서 상실로 진입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여아는 여성대상(동성애)과 남성대상(이성애)을 금기로 자신의 내부에 선취하게 된다. 어떠한 성애도 가능하지 않은 이 이중의 금기가, 엄격한 이성애자는 (동성애 금기에 반응하는) 동성애자의 반영, 즉 알레고리이며 드래그는 (반대로 이성애 금기에 반응하는) 진정한 이성애자의 알레고리라는 역설이 가능해진다.2 이를 바탕으로 버틀러는 정체성이 “문화와 사회가 반복적으로 주입한 허구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패러디가 가능해진다. 패러디란 의도적 모방으로, (모방본이 모방하는 것은 원본이 아니라 원본의 이상적 자질이기 때문에) 원본과 모방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크로스드레싱의 정치성은 거기에 있다. 뮤지컬 속 인물들은 특정한 젠더 특성을 모방하면서 젠더의 모방적 구조 자체를 가시화하고 있다.
인간을 구성하는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희석 역에 지정성별 남성으로 식별되는 배우를 캐스팅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지희와 희석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희석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무엇도 아니라면 인터섹스(intersex, 간성)인가? 페미니즘의 역사는 네 가지 물결로 가시화된다. 뮤지컬 ‹앨리스 스튜디오›는 페미니즘적이고 퀴어리즘적이다. 각 인물의 서사가 사회적으로 억압되어 왔던 각각의 문제를 가시화한다. 공연 막바지에는 앙상블의 대화를 통해 깨알 같은 비거니즘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옷은 제 2의 피부다. 옷은 단순히 원단으로 만들어진 무기체적 구성물이 아니다. 포스트 휴먼 시대의 의복은 인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고유한 신체기관으로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몸으로부터 배반당하고 소외당한 트랜스젠더퀴어-크로스드레서는 이 질서 안에서 해명되지 않는다. 뮤지컬 ‹앨리스 스튜디오›가 제기하는 것은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몸(옷)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앨리스 스튜디오에 가면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어보고 사진 찍을 수 있다. 그리고 언제든 갈아입을 수 있다. 로라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여성’의 목소리는 희석의 입으로, 승주의 입으로, 앨리스의 입으로 옮겨 간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앨리스였어.” 우리는 모두 퀴어일 수 있다. 우리는 이성애·유성애중심주의적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성(性)의 독자성이나 순수성을 주장할 수 없기에 언제나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주체-대상들이다. 우리는 스튜디오에서 모두 앨리스가 된다.
뮤지컬은 희석 앨리스와 승주 앨리스가 친족 관계를 벗어나 타자로서 서로를 마주 보며 막을 내린다. “안녕, 나의 앨리스 스튜디오, 사랑을 잃고 사랑을 받던 곳. 안녕, 고마워. 사랑할게. 나를 찾을게.” 우리는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고 벗으며, 크로스드레싱하며, 횡단한다. 희석과 승주의 마주보기는 관객들에게로 옮겨 간다. 관객들은 무대의 앨리스들을 마주보며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앨리스를 찾아낸다. 나를 사랑하는, 나를 찾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유하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글 백설이
1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 『젠더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문학동네, 2008, p.33.
2 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pp.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