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만의 시그니처는 많은 예술가에게 중요하지만 무대의상을 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처음 무대의상 작업을 시작했을 땐 나만의 시그니처를 찾아내고 그것을 관객이 잘 읽어내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욕심을 부린 적도 많았고 그렇게 올린 공연을 보면서도 전체가 아닌 내 의상만 봤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상에서 홍문기라는 디자이너의 스타일이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이 꽤나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결국 극중 캐릭터들을 거꾸로 디자이너에게 맞추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요즘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의상에서 ‘나’, 홍문기가 보이는 것을 얼마나 잘 배제할 것인가이다.
그렇다고 창작자로서 시그니처를 갖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엔 결과물, 즉 의상에서 묻어나는 시그니처 대신 의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콘셉트를 잡는 방식’이 나만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나는 대본을 받으면 의상 콘셉트를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모든 공연에 적용되는 나만의 방법이다. 의상 작업을 하다보면 중간에 바꿔야하는 의상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때 전체적인 콘셉트의 중심이 없다면 전체 의상의 앙상블이 무너지기 때문에 내가 정의 내린 콘셉트가 확고해야 그 안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다.
의상 콘셉트를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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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을 읽고 떠올랐던 단어를 나열하고 그 단어에 적합한 다양한 이미지들을 찾는다. 무대의상 작업이지만 의상 이미지에 국한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무대나 조명의 느낌들도 찾아서 연출부와 공유하고 다른 디자이너들과 얘기해보면서 가닥을 잡아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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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이미지 맵이 완성되었다면 대본을 다시 보면서 대본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대사를 찾아낸다. 그것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다. 각 캐릭터마다 중요한 대사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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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과 2번에서 찾아놓은 것을 토대로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보는데, 그것만 읽었을 때도 극이 전체적으로 그려져야 한다. 그렇게 하나의 문장을 다시 하나의 단어로 압축하고 나면 그것이 꽤나 추상적이지만 내가 작업을 하면서 지켜야하는 콘셉트의 구심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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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 압축된 단어가 잘 해석된 시와 이미지를 하나씩 찾아낸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한 페이지에 공연에 대한 의상 콘셉트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기에 연출부와 회의할 때도 명확하게 나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해왔던 이런 작업이 쌓이고 쌓여 지금은 나의 방법이 되었고, 이것이 곧 나의 시그니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럽지만, 무대의상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공연에 있어서 자기만의 중심을 잡길 바란다고 전하고 싶다. 그 중심을 잡기 위한 과정에서 쌓이는 모든 것들이 결국 본인만의 시그니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