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일, 흙 토(土)에 태양 일(日),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서 토일. 무계획 임신 5개월 차, 허나 출산 후 5개년 계획은 PPT로 내보일 수 있을 만큼 대찬 성품을 가졌다. 그런 토일이지만 어머니의 재혼으로 가족이 된 새아버지와는 10년 넘도록 이유 모를 거리감을 느낀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에 앞서 저 자신이 처음 뿌리를 내렸던 토양을 살펴보고 싶었던 걸까, 토일은 성씨와 직업만 아는 친아버지를 찾아 부른 배를 안고 고향 대구로 내려간다. 최씨 성을 가진 기술가정교사 몇몇을 거친 끝에 토일은 우연한 계기로 친아버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생물학적 부녀관계라고 해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식의 애틋한 논리가 작용할 리 없다. 토일은 자신을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 친부 앞에서 분노를 터뜨린 뒤 그대로 자리를 뜬다. 상경한 토일 앞에는 기가 막힌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뱃속 아이의 아버지인 애인 호훈이 종적을 감춘 것이다.
최하나 감독의 영화 ‹애비규환›은 신파도, 미화도 없는 가족코미디다. 영화는 무겁지 않은 톤을 유지하며 기존의 가족 이데올로기를 구성했던 각종 관념들을 뒤집어엎고 있다. 혈연중심의 가족주의, 정상가족신화, 혼전임신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등등이 그것이다. 영화는 첫 시퀀스부터 “유교의 폐해가 이 사회를 좀먹고 있다”는 토일의 진단을 들려주며 나아갈 방향을 예고한다. 그중 정상가족신화는 ‹애비규환›이 가장 공들여 무너뜨리는 영역이다. 정상가족은 이성애에 기반한 부부의 출산과 입양으로 이루어진 가부장 중심의 핵가족을 뜻한다. 정상가족이 선호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생산과 재생산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 양육, 가사노동으로 경제활동의 기반인 노동력이 확보된다. 둘째, 측량화가 가능하다. 4인 가구는 기업이 생산과 소비 패턴을 유지하고 측정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인식된다. 결국 이 가족모델은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충족시킨다는 이유로 정상이 되고 표준이 되어 ‘정상가족’이라 불리게 된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토일은 정철의 속미인곡을 연시가 아니라 충정의 송가로 받아들이는 유교적 관념에 대해 소리 높여 비판하는 인물이다. 그런 토일조차도 영화 초반에는 혈연중심의 정상가족신화에 기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한 상태로 제시된다. 토일에게는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사라지고 낯선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게 된 상황에 대한 상흔이 남아있다. 이는 토일이 이혼을 실패로, 재혼 가정은 ‘정상적이지 않은 집’으로 규정하게 된 계기로 작용한다.
이후 영화는 토일과 토일의 어머니, 그리고 두 아버지가 합심하여 사라진 호훈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토일이 아니고서야 절대 뭉치지 못했을 이들의 조합을 보노라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토일의 친부인 환규와 토일의 친모인 선명은 법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토일의 양부인 태효와 그의 처의 전남편인 환규는 문자 그대로 생판 남에 불과하다. 그러나 태효도 환규도 토일 입장에서는 똑같이 아버지고, 선명과 환규는 토일의 부모라는 한 카테고리에 묶이게 된다. 토일을 구심점으로 한데 모인 이들을 가족 구성원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매우 합당해 보인다. 무슨 일에건 몸으로 부딪치고 보는 환규의 성격은 토일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고, 사자성어를 섞어가며 입심을 겨루는 태효와 토일 부녀는 호훈의 기를 죽일 만큼 천하무적의 호흡을 자랑한다. 극중 태효는 누구보다도 토일을 존중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두고 “15년 동안 정말 많이 노력했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토일을 딸로 대하는 데 있어서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는 대신 인위적인 힘, 즉 노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내세우는 자연주의적인 가족애와는 다른 새로운 가족애에 다름 아니다. 토일을 아끼고 염려하는 태효의 마음만큼은 신화화된 정상가족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편 토일의 생물학적 친부인 환규는 그 스스로도 일관되게 “아빠는 적성에 맞지 않다”고 말하는 만큼 이상화된 혈연가족 이미지의 재현을 거부하는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호훈네 또한 토일네와는 다른 의미에서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나 ‘예외가족’이라 불릴 만한 가정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화기애애한 모습은 한국적 가족주의의 토양에서 자라난 보통의 가정들과는 다르다.

ⓒ아토ATO/리틀빅픽처스
토일의 어머니 선명이 재혼 후 친정을 벗어나야 했던 이유는 그녀가 정상가족만을 인정하는 가부장체제에서 이탈했기 때문이고, 선명의 고향인 대구가 전통적으로 가부장체제를 중시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비혼 가구와 이혼 가구의 확대, 저출산과 고령화의 고공행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호명되는 가족은 여전히 정상가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은 정상가족보다는 정상가족신화가 공고한 사회다. ‹애비규환›은 재혼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고 해서 유대의 기반이 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가부장체제의 산물인 각종 통념들(“여자는 남편한테 져 주면서 살아야 한다”, “혼전 임신은 자랑거리가 아니다”)을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한 방식으로 격파해낸다. 그와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애비규환›에서 이야기되는 가족주의가 혼인관계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 아쉬움은 있다. 재혼가정 또한 법적 혼인관계로 묶여있다는 점에서는 이탈 이후 새롭게 재구성된 정상가족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애비규환›은 정상가족신화를 비판하는 듯 보이면서 더 넓고 온건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논의 자체를 포섭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애비규환›이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고, 이탈하고, 탈-구성되는 정상가족들을 새로운 형태의 기조로 담아내고 있음은 곧 이 영화가 삶을 구성하는 여러 관계 양상의 재구성을 통해 일상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회적 인식은 구성원들이 처한 조건에 따라 늘 변화해왔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과 실제적인 조건, 구성원들의 요구 사이에서 절충안을 찾기 위해서는 규격화된 기존의 인식 틀을 유연하게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 일상의 미학을 보여주는 대중영화는 그 역할의 최전방에 설 수 있는 매체로 거론되곤 한다. 말하자면 ‹애비규환›은 대중영화로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내재해 있는 인식 개선의 잠재태에서 출발하여 그 현실태를 사회적 공간과 관계 내부에서 새롭게 생산해낸다.1 무심한 듯 대범하게, 특유의 거침없는 태도를 가지고서 말이다. 영화의 장점은 두 번의 배드민턴 코트 씬처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분명 ‹애비규환›은 가부장체제가 가정 내로 정주시켰던 가족주의 코드를 공적이고 집합적인 에너지로, 더 이상은 무겁거나 은밀하지 않은 웃음의 한 요소로 발산하고 있다.
“이 결혼 망해도 된다구. 이혼하면 되지 뭐.”라는 엔딩 속 토일의 대사는 얼핏 결혼 제도를 가벼이 여기는 능청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러나 이 말은 결혼 상태를 생애주기의 필수 요소이자 일종의 자격 요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새 시대의 새로운 가족주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탈혼’으로 살던 지역을 이탈해야 했을 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던 과거의 어머니에게 건네는 토일 나름의 위로이기도 하다. 재구성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제 삶을 긍정하는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한 마디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게 해석될 수 있는. “어떤 토양이건 괜찮다구. 태양만 있다면 잘 자랄 테지 뭐.” 분명 그럴 것이다. 새로운 흙에서 새로운 태양을 쬐며 자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