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종에 입학한 첫 학기 첫 전공 수업에서 나는 남의 자리에 잘못 앉은 기분으로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한예종 학생답지 않은 것 같아요. 입시 과정에서 전산 오류가 있었던 것 아닐까요. 선생님은 되물으셨다. 한예종다운 게 뭔데요? 여러분이 한예종의 일부이니 여러분다운 것이 곧 한예종다운 것입니다.
사회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능력을 시험받는 삶의 관문에서 실격당하고, 또 소외당해 내몰리고 내몰리다가 예술이라는 자리에 도착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만난 동료 중 누군가는 체념하듯 말했다. 제가 이거 아니면 뭘 하겠어요. 아니, 농담처럼 말했던 것 같다. 다짐이나 선언 같기도 했다. 예술이 아니면 안 된다고 단언하는 말투가 마치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아들인 용사 같았다. 나는 그의 확신에 공감하지 못해 두려웠다. 간절함마저 부러웠다. 예술가라고, 적어도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자신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지금은 안다. 한예종 캠퍼스 한복판에서 예술에 관한 설문지를 돌린다면, “나는 예술가다.”라는 항목에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 중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고 한참 망설일 사람이, 고민 없이 그렇다고 답할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을. 예술가가 무엇이길래. 예술이 무엇이길래.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기준이란 얼마나 명확하고 합리적이며 견고하길래.
나는 여전히 한예종과 예술을 임시거처라고 느낀다. 매일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드나든다는 외로움과, 언젠가는 딱 걸리고 말아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지니고 다닌다. 그런데 이 불길한 감정들은 내 예술 활동의 기반이자 내가 쓰는 글의 주재료이기도 하다. 속할 곳을 찾아 헤매는 마음, 나는 반쪽짜리라는 믿음, 시간과 목숨과 사랑과 행복처럼 소중한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는 느낌, 반드시 내쳐지리라고 예상하는 버릇, 나를 인정해 달라고 소리치거나 설득하는 언어들.
매거진 『K-ARTS』 필진에 지원하며 자기소개란에 나는 예술 안팎의 경계에 자리한 사람이기에 예술에 관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관점과 입장이 있다고 적었다. 한예종 내부와 외부 사이의 창구가 되는 매거진 필진으로서 제격이라고. 자리는 공간이기도 하고, 위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자기 인식 및 자기표현의 모양과 색깔과 형식을 좌지우지하는 한 존재의 정체성이다.
예술은 항상 자본주의의 원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 의의를 증명하라 요구받고 또 수행하려 애쓴다. 동시에 예술 분야 안에서도 별종으로 여겨지며 스스로의 자리를 증명해야 하는 분야가 주류 밖에 존재한다. ‘순문학’이라 불려 온 문단문학과 장르문학이 구분되듯, 예술의 실천과 이론이 구분되고, 성공한 작품과 실패한 작품이 구분되고, 예술가와 ‘여성 예술가’가 구분되고, 예술 학교에서 허용되는 자유로움과 금지되는 자유로움이 구분된다.
가장자리로 밀려나며 느끼는 위협과 위태로움은 피해의식을 낳아 세상을 삐딱하게 보게 되기도 하지만, 투쟁과 창작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가장자리란 한정된 구역이나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중심이라고 설정된 자리로부터의 상대적인 거리를 뜻한다. 가장자리에서는 중앙을 갈망하게 되는 순간도 구석이 마음 편한 순간도 언제나 함께 머문다.
그러나 중앙은 있는가?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독자에게 가정된 중앙의 개념을 해체하고 예술의 기준을 프로듀싱하는 공동 편집자의 역할을 함께 맡기를 제안한다. 순수 예술과 순수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을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자기 자리에서 예술을 하며 존재함으로써 계속해서 예술의 형태와 의미를 재설정하고 확장하기를 기대한다.
관객의 박수는 반응이 아닌 연주로서 공연의 대목이다. 악의를 가지고 대자보를 훼손한 이 또한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찢겼다가 수선된 자국이 아름답게 남은 가장 최신 버전의 대자보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직전 학기 수강생의 질문은 다음 학기 강의 계획서에 새로이 적힌다. 한예종에서 가장 한예종답지 않은 학생조차 한예종을 이루는 구성원이다. 중앙은 한 곳일 수밖에 없지만 가장자리는 유일하지 않다. 모든 자리가 가장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