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꺼지면 객석은 두 무리로 갈라진다. 숨까지 접어 넣고 그 어떤 소리도 아끼는 사람들, 그리고 첫 박수의 빈틈을 노리며 예열하는 사람들. 누군가는 이것을 매너의 문제라 말하고, 인터넷에선 ‘시체관극’이나 ‘떼창’ 등, 서로를 조롱하는 밈이 쉼 없이 돌아간다. 몇 차례 그 현장을 통과하고서야 이것이 단순한 예절 공방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현존의 형식을 놓고 벌어지는 충돌이라는 것을 배웠다. 어떤 밤에는 침묵이 호흡의 길이를 늘여 다음 장면을 받쳐 올리고, 다른 밤에는 관중석에서 터지는 후렴이 무대의 박자를 밀어 올린다. 관객은 일방적 수용자가 아니라, 반응의 타이밍과 강도를 함께 설계하는 공동 편집자에 가깝다. 무대 위에서 완결된 무언가를 우리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바깥과 객석 사이에서 매 순간 맺고 푸는 작은 합의들(눈빛, 손짓, 목을 가다듬는 소리와 저마다의 숨)이 하나의 악보가 되어 작품을 다시 쓰게 만든다. 나는 그 악보의 미세한 기호들을, 공연 후 귀에서 오래 우는 잔향처럼 더 또렷이 기억한다.
이 작은 합의들이 굳어질 때 그것들은 ‘매너’의 이름으로 호출되지만, 실은 형식을 만드는 규칙으로 작동한다. 누군가 기침을 미루는 순간 옆자리의 어깨도 같이 낮아지고, 무대 위 호흡은 한 박자 길어진다. 반대로 무대가 침묵을 길게 끌던 구간에서 누군가 후렴을 아주 낮은 음으로 받아 부르면, 멀리 떨어진 좌석의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잡으며 객석의 공명이 형성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판본이 바뀌었느냐’다. 발화의 권리, 멈춤의 정확도, 반복의 정확도, 조명의 명암비, 러닝타임의 미세한 조정 같은 것이 다음 회차에서는 새로운 설정값이 된다. 종종 공연이 끝난 뒤 프로그램 북의 여백에 그날의 숨 길이와 박수 물결의 지연, 객석의 밝기 같은 것을 숫자와 글로 옮겨 적는다. 다음 번에 내가 마주할 작품은 그 숫자들을 재료로 하여, 이전과 다른 조리법을 택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극장 안의 ‘시체관극’과 콘서트장, 경기장의 ‘떼창’은 서로 반대에 놓인 양극단의 끝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가지 다른 생산술일 뿐이다. 하나는 부재를 통해 장면을 두텁게 하고(소리의 배경을 짙게 칠해 미세한 변화가 정보가 되도록), 다른 하나는 과잉을 통해 장면을 확장한다(개인의 목소리들이 공명하며 소유보다 소속이 정보가 되도록). 전자는 음향을 무대 위 사람들에게 귀속시키는 윤리, 후자는 음향을 공유지로 반납하는 윤리다. 어느 편을 더 사랑하느냐는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이 장면이 요구하는 현존의 방식은 무엇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단일한 음성의 해상도를 끌어올리는 침묵인가, 아니면 다중 음성의 위상을 정렬하는 합창인가. 같은 작품이라도 어떤 날은 침묵이, 또 어떤 날은 합창이 더 정확한 증폭기가 된다. 이 질문을 공연 도중에도, 객석을 떠난 뒤에도 여러 차례 다시 떠올린다. 질문이 바뀌면 감상도 바뀌고, 감상이 바뀌면 형식도 바뀐다.
두 생산술은 시간의 감각을 다르게 만든다. 먼저, 극장의 시간은 대개 벡터를 따른다. 앞에서 뒤로, 원인에서 결과로, 장면에서 장면으로. 시체관극의 침묵은 이 벡터의 연결을 매끈하게 해주는 윤활유이다. 반면 콘서트와 스포츠의 시간은 루프에 가깝다. 후렴은 돌아오고, 응원은 되풀이되고, 특정 구호는 경기마다, 투어마다 재현된다. 떼창은 루프의 결속을 강화하고, 강화된 루프는 다시 떼창의 성공 조건이 된다. 이 때문에 두 공간에서 ‘좋은 반응’의 정의가 어긋나는 것은 필연이다. 벡터의 시간에서는 멈춤의 정확도가, 루프의 시간에서는 반복의 정확도가 미덕이 된다. 동일한 곡을 두 번 들었던 어떠한 밤을 기억한다. 첫 번째는 모든 사람이 숨을 들이마시고 버티던 브리지가, 두 번째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한목소리로 오버래핑하며 떠받치던 브리지가 되었다. 두 밤의 기억은 같은 곡 안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이 깔릴 수 있음을 사람들의 귀에 각인시켰다. 관객이 시간의 재배치를 수행할 때, 작품은 같은 제목으로 다른 판본이 된다.
발화 권리의 배치에서도 두 형식은 서로 다른 지도를 그린다. 극장은 말할 권리를 무대 중심에 모으고, 객석은 자발적 유보를 통해 ‘집중’이라는 자원을 마련한다. 무대의 목소리에 최대의 해상도를 부여하겠다는 합의이다. 반대로 콘서트장과 경기장은 발화 권리를 군집에 배분하되, 그 배분을 리더의 큐, 콜 앤 리스폰스, 라이트 신호 등으로 규율화한다. 떼창은 무질서가 아니라 조직된 과잉이다. 때론, 이 규율화가 제대로 작동하는 순간이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몫이 전체의 위상에 정렬되는 경험. 그 정렬은 개인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을 공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밤에는 합창이 더 정확한 고독이 된다. 하나의 몸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온도와 음압의 영역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 고독은 사라지지 않고 완전히 공유된다.
여기서 잠시, 관람 태도와 현상을 분석하는 이 글의 객관적 서술을 점검해보자. 나는 어떤 밤에는 극장의 정적을, 또 어떤 밤에는 콘서트장의 파도를 사랑한다. 어떤 날은 객석의 한숨이 내 생각을 정리해 주고, 어떤 날은 낯선 사람의 어설픈 박수가 내 박자를 미세하게 재단한다. 한 사람이 머무는 지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창작자의 의도를 더듬는 독자이기도 하고, 현장을 번역하려는 관찰자이기도 하며, 때로는 제도의 내부에서 관객의 권리를 설계해 보고 싶은 운영자의 시선을 빌리기도 한다. 이 세 자리를 오가며 깨달았다. 내가 추구하는 객관은 중립의 표정을 흉내 내는 태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포지션을 왕복하며 겹치는 지점을 찾아내는 기술에 가깝다. 어느 자리에 서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의 목록이 바뀌고, 그 목록이 곧 글의 논리를 바꾼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한 자리에 고정된 시선으로 쓰지 않으려 한다. 대신 그 왕복의 흔적, 즉 관객·제작·제도의 삼각측량이 그려내는 도면을 따라가며, 오늘의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합의와 실패,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형식의 변화를 기록하고자 한다.
관객의 자치가 공저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약속의 공개성. 행위는 임의성이 아니라 합의성에 기댄다. 둘째, 약속이 피드백으로 되돌아오는 가시성. 특정 장면에서 합창이 다음 투어의 편곡으로 고정되거나, 정적이 배우의 호흡 설계로 환류하는 순간 관객은 자신이 형식에 기여했다고 느낀다. 셋째, 실패의 분산. 질문권 슬롯, 구역 레이어링, 촬영 허용 범위 같은 제도적 장치는 실패의 책임을 일방에게 전가하지 않고 모두가 조금씩 나누어지게 한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될 때, 관객의 자치는 창작자의 의도를 교란하는 변수가 아니라 창작자가 의도할 수 있는 설정값으로 편입된다. 나는 이 설정값이 에티켓이나 매너의 표어가 아니라, 구체적 기술의 언어로 쓰이길 바란다. “여기서는 조용히, 저기서는 함께, 그 사이에서는 기다렸다가”와 같은 간결한 문장이 오히려 더 정교한 질서를 만든다.
이 질서는 우회로가 아니라 사소한 디테일에서 작동한다. 나는 공연장의 구조가 관람 예절을 공지문 대신 몸의 문법으로 새겨 넣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통로의 폭은 타인의 어깨를 스치기까지 허용되는 망설임의 길이를 정하고, 좌석의 경사는 시선과 귀가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야 하는지를 미세하게 지시한다. 스피커의 배치와 잔향의 길이는 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은근히 가리킨다. 이렇게 공간은 규칙을 말하지 않고 행동을 유도한다. 공연 관람의 윤리는 문장으로 선언되기 전에 동선과 각도, 시간 지연 같은 물질의 표정으로 먼저 배포된다. 일직선으로 뻗은 시야, 마른 잔향, 어둠에 잠긴 객석은 목소리를 무대 위 한 점에 고정해 단일한 중심을 세우고, 분산된 스피커와 지연 보정, 조명과 대형 스크린은 소리와 시선을 군집으로 분해해 여럿의 중심을 만든다. 전자는 집중을 통해 ‘듣는 자’를 한 방향으로 모으고, 후자는 공명을 통해 ‘함께 내는 자’를 등장시킨다. 그래서 건축과 장치는 규범의 외피가 아니라 그 실행 알고리즘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그 알고리즘 위에서 언제 조용히 머물고 언제 함께 발화할지, 이미 절반쯤은 결정된 몸으로 객석에 앉는다. 하지만, 이 알고리즘은 닫힌 코드가 아니다. 파라미터는 현장의 입력에 따라 수시로 가감되고, 남은 절반은 우리의 합의, 주저, 실수로 채워진다. 같은 구조라도 다른 결과가 출력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계가 방향을 제시한다면, 결과를 확정 짓는 것은 늘 그날의 관객이 수행하는 미세한 연산이다.
그렇다고 이 물질적 차이를 장르의 운명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다. 현장은 순응이 아니라 재배치를 학습한다. 반복적으로 자발적 합창이 솟는 구간을 확인한 극장은 그 지점을 러닝타임 안의 공식 ‘응답 창’으로 편입시키고, 팬 커뮤니티가 요청한 고요의 순간은 콘서트의 브리지에 실험적으로 배치되어 다음 투어의 표준이 된다. 스포츠 현장에서도 서포터 연합과의 협의로 추모나 판독 구간 외의 무응원 구간이 신설되거나, 반대로 특정 구호의 지속을 줄이는 식의 조정이 이루어진다. 이런 교차는 구조가 관객을 길들이는 장면이 아니라, 관객이 구조의 파라미터를 다시 세팅하는 장면에 가깝다. 그 축적이 두 형식의 간격을 전장(戰場)에서 벗어나게 하고,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두 엔진 사이의 여유로운 스펙트럼으로 넓힌다.
나는 한 편의 공연을 보고 나오며 ‘좋았다/나빴다’라는 말보다 먼저 이렇게 묻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오늘의 조건은 무엇을 가능하게 했는가. 침묵은 무엇을 드러냈고, 합창은 무엇을 덮었는가. 멈춤의 정확도와 반복의 정확도는 각각 어디에서 미덕이 되었는가. 이 질문들은 곧 내 감상의 좌표를 만들고, 좌표는 다시 나를 현장으로 돌려보낸다. 다음 번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른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고, 다른 호흡으로 숨을 고를 것이다. 관람이 창작을 바꾸고, 바뀐 창작이 다시 관람을 바꾸는 순환이 여기서 닫힌다. 이 순환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재생산’의 정확한 모습이다. 복제가 아니라 버전 관리. 중심의 갱신이 아니라 판본의 증식. 제품이 아니라 과정.
여기까지 섰을 때, 비로소 나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힐 수 있다. 나는 어느 한 형식을 ‘정답’으로 삼고 싶지 않다. 대신 장면이 요구하는 현존의 정확도를 높이고 싶다. 침묵이 필요한 장면에 침묵을, 떼창이 필요한 장면에 떼창을, 그리고 둘 다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는 둘 다 거두는 감각. 그 감각을 우리는 관객 커뮤니티의 자치와 제도의 설계, 창작자의 태도 사이의 감응으로 길러낼 수 있다. 여기서 윤리는 규제의 이름이 아니라 배려의 기술이 된다. 청각 과민과 유아 동반, 휠체어 접근과 언어 지원 같은 조건들이 안내문을 넘어 연출의 일부가 될 때, 배려는 ‘미덕’이 아니라 형식이 된다. 형식이 된 배려는 감상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넓어진 스펙트럼은 다시 창작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때로는 실패가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 고요한 객석 속에서 울리는 알림음, 떼창 공연 속의 무임승차, 대화를 점유하는 발화. 그러나 실패는 이 체계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소화된다. 기록되는 한, 그것은 곧 디버깅 로그가 되어 다음 판본의 안정성을 높인다. 공지는 어떤 문장을 덧붙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문장을 과감히 덜어낸다. 시간 코드는 실제 관성에 맞춰 앞당기거나 늦추고, 필요하면 통째로 비워 둔다. 공간의 경계는 굳히기보다 흐르게 하여,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임시로 풀었다가 다시 묶는 식으로 운용된다. 중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학습이다. 여기에서 학습은 규율을 촘촘히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니라, 가역성과 완충을 확보하는 일, 즉 되돌릴 수 있게 만들고, 숨 쉴 틈을 남겨 두는 일이다. 디버깅 로그는 통제를 강화하는 근거가 아니라, 환대와 집중 사이의 최적 범위를 탐색하기 위한 흔적에 가깝다. 학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표준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호출할 수 있는 복수의 표준을 얻는다. 같은 제목 아래 서로 다른 판본이 공존할 때, 비로소 관객 문화가 예술을 재생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재생산은 누군가의 원본을 잠식하는 파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 위에서 드러나는 다수의 중심을 실험하는 일이다.
이 글의 자리는 제도의 바깥에서 도덕을 훈계하는 곳이 아니라 제도의 안쪽에서 규칙의 문장들을 미세 조정하는 내재적 비평에 가깝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거창한 규범이 아니다. 관람의 작동을 실제로 바꾸는 몇 줄의 최소 문법(회차의 감상 모드를 예고하는 라벨, 함께 발화할 순간을 미리 열어 두는 시간 코드, 반응의 강도를 층위로 나누는 좌석 운용, 기록과 공유의 경계를 투명하게 밝히는 라이선스, 발언의 독점을 방지하는 질문권의 할당)이야말로 오늘 현장을 움직이는 언어라는 점이다. 이 문장들은 금지의 목록이 아니라 환대의 형식으로서 기능할 때 힘을 갖는다. 다만 형식은 언제나 권력의 편향으로 기울 수 있기에, 나는 이 문장들이 가역성(상황에 따라 쉽게 풀고 다시 맺을 수 있음)과 가시성(누가,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를 정했는지 드러남)을 함께 포함하길 원한다. 그래야만 설계가 통제의 다른 이름이 되지 않고, 관객의 자치가 배제의 장치로 오염되지 않는다.
그렇게 작동하는 순간, 우리는 ‘예절’이라는 추상어를 반복하는 대신 형식을 말하게 된다. 오늘의 회차가 침묵을 요청한다면 무엇을 더 정확히 들려주려는 것인지, 응답을 허용한다면 어떤 공명이 어떤 장면을 더 멀리 보내는지, 기록을 열어 둔다면 그 기록이 다음 판본의 어디에 닿을지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 속에서 나는 오래 보고 싶은 장면을 상상한다. 누군가의 침묵이 타인의 숨을 살리고, 누군가의 합창이 타인의 용기를 밀어 올리는, 서로의 몸이 서로의 증폭기가 되는 순간. 우리가 그 순간을 위해 기꺼이 지키는 한두 줄의 약속은 공지의 문구가 아니라 공동의 기술이 된다. 설계는 결국 사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최소치의 언어이고, 그 언어를 통해 우리는 작품을 더 좁게 관리하는 대신 더 넓게 작동시키는 법을 배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이 독자의 사적인 기억과 어딘가에서 연결되기를 바란다. 당신이 오래 기억하는 한 장면(무대 위 인물의 손등이 떨리던 순간, 화면의 어둠 속에서 울리던 작은 숨, 수천 개의 목이 동시에 올라붙던 후렴, 경기장에 깔리던 함성의 굵은 대역, 또는 한순간의 정숙)을 떠올려보자. 그 장면을 가능하게 만든 관람의 태도와 자치의 규칙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 규칙은 다음 판본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우리의 대답이 조금씩 다를 때, 바로 그 차이가 동시대의 예술을 재생산한다. 다수의 엔진이 작동하는 소리, 판본이 늘어나는 소리, 실패가 학습으로 바뀌는 소리. 그 소리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호흡과 손뼉을 맞추는 법을 익힌다. 오늘의 객석은 예절 교실이 아니라 실험실이며, 그 실험은 이미 우리 각자의 몸에서 충분히 시작되었다.
글 김회연
미술원 미술이론과 예술사 재학 중, 무용원 예술경영 부전공. 예술이
다른 학문·현장과 만나는 방식을 탐사하며 최근에는 AI 운영 논리를
탐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