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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의 형상

‘이론적 실천, 실천적 이론’. 영상이론과 입시를 준비하던 시기에 경전처럼 되뇌던 말이다. 입학할 당시에는 순환 모델의 후자에, 그러니까 ‘실천적 이론’에 눈길이 갔다. 보통 이론과 실천은 (필연적으로 불가분한 관계임에도) 서로 타협할 의지가 없거나 배타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천적’이라는 수사가 ‘이론’ 앞에 붙은 것을 보자마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당시에 나는 이론을 현실과 동떨어진 (죽은) 지식으로 파악했으며, 실천을 실기 내지는 창작으로 한정해 생각했다. 그래서 이론과 실천이 서로를 수식하며 포함하는 ‘이론적 실천, 실천적 이론’의 순환 모델을 대안적 연구 방법론으로 여겼다. 이론이 어디에서든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듯했고, 그 반향의 여파를 상상하며 쉽게 낙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다니며 점차 이론을 하나의 실천적 개입으로, 적극적인 행위로 작동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일보다 실기를 배우고 싶어졌다. 실기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 왜일까? 원래부터 관심사의 폭이 넓었다는 점은 차치한다면, 이론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이론 자체의 실천적 지위와 무관하게 이번에는 ‘이론적 실천’을 오독하고 싶었던 걸까? 여기서 이론은 무엇이고 실천은 무엇인가? 특히 ‘실천’은 어떻게, 어느 정도로 우리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그냥 소설이 쓰고 싶었으니까, 영상이 찍고 싶었으니까, 미술이 하고 싶었으니까 한 거 아니야? 라고 내게 직접 물은 사람은 없지만, 스스로 이런 의심을 품었다. 지금에 와서 변론하자면 실기에 대한 욕망, 혹은 (아직 섣부르긴 하지만 이를 실천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실천에 대한 욕망을 이론/연구/비평에 대한 욕망에서 하나의 ‘다음’으로 전환한 것으로 판단할 때, 그 논의가 지나치게 협소해질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확실히 그을 수 있고, 그것이 서로 무관하다는 전제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접근으로, 실천에 대한 욕망을 이론의 ‘적용’으로 갈음한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실천은 ‘이론의 현실화’ 같은 간명한 정리를 넘어서, 개인의 직관과 사적인 차원의 정치가 개입하며 전개되는 사태다. 앞선 순환 모델을 따르자면, 이론이 ‘실천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작업’ 정도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고, 현실을 끌고 들어오며 현실 그 자체에 작용하듯이, 실천 또한 개념에 대한 실현 내지는 행위로 축소될 수 없다. 실천은 이론을 늘 참조하지만 동시에 이론을 초과한다. 이론이 계속해서 새로운 체계를 창안할 수 있는 이유 또한 실천이 개념화와 범주화를 넘어, 미지의 감각적·정서적 사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을 이분하여 그것 간의 전환 지점을 상상하는 것보다는, 양자 간의 관계를 살피는 일이 순환 모델을 독해할 때 더 중요하다. 이론을 할 때 실천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며, 실천할 때 이론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즈음에서 ‘실천(practice)’을 규정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그 전에, 이 글의 목적은 이론과 실천 각각을 개념적으로 탐구하여 순환 모델을 재해석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이론(theory)’이라는 것은 자연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는 광의의 개념일뿐더러, 이를 예술이론으로 한정하더라도 이론과마다 위치한 역사적/연구적 맥락과 좌표가 상이하기 때문에 이론 일반을 관통하는 기획은 불가하다. 급한 셈 치고 실천을 이론의 반대 항으로 상정하더라도 분과마다의 개별을 파악한다면 실천의 종류 또한 일률적일 수 없다. 이 글은 그보다, 몇 년간 학교에 다니며 실기과를 부전공하기로 한 나의 결정과 그로부터 촉발된 몇 가지 의심에서 출발한다.

앞선 질문을 끌고 와 반복해 물어보자. 나는 왜 실기를 하고 싶어졌을까? 더 면밀히 질문하자면, ‘실기’를 하는 것이 어떻게 이론과 ‘다른 실천’이라고 생각한 걸까? 우리가 ‘실천’에서 흔히 ‘행위’를 연상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크게 의아한 지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당연해 보이는 이 지점을 다시금 물음에 부쳐야 이론과 실천에 관한 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지리라고 생각한다. 비약을 감수하며 거칠게 분류하자면, 이론과 학생으로서 ‘실천’은 두 갈림길로 나뉜다. 우선, 현실을 반영하는 작업에 대한 비평의 실천(이론적 실천)이나 세계 개조에 관한 작업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읽어내어 분류 및 개념화하는 방식(실천적 이론)과 같이, 이론을 하나의 실천적 행위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1 여기서 (나의 오독과 달리) 순환 모델은 이론 자체의 실천적 측면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검토하려는 시도이지, ‘실기’를 도식에 포함해 이론과 실기의 관계성을 논하려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그러하듯이 예술이론과 예술실기의 커리큘럼을 전문적으로 분리하여 이론과 창작을 대당 구조로 두고, 둘의 협력과 동행을 실천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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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이론적 실천, 실천적 이론’의 비평적 맥락, 특히 한국의 70년대 문학비평계 내에서 김현을 주축으로 담론화된 배경을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있다. 당대에는 현실과 문학이 맺는 관계성을 기준으로 작품을 이론적 실천과 실천적 이론이라는 두 가지 태도 및 방법론으로 양분하였다. 그러므로 ‘이론적 실천’은 창작이나 실기로 직결되기보다, 오히려 대상으로서 작품(작업)을 어떤 관점에 따라 읽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이론적 행위이다. 조연정, 「김현 비평에서 ‘ 이론적 실천’의 의미와 비평의 역할」, 『현대문학의 연구』, 59, 2016, 323~364p.

이러나저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로는 이론이건 실기건 모두 ‘실천’인 셈이다. 실천이라는 기표 안에서 이론과 실기가 무분별하게 긍정되고 있는 형국이다. 당연히 이론보다는 실기가 우위를 점한 채로. 그렇다면 이것은 선택의 문제인 것인가? 이론을 하든, 실기를 하든, 무엇을 하면 그것은 곧장 실천으로 작동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것을 실천이라고 선언하는 것 외에, 그것이 실천이기 위해 어떤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이는 선택의 문제가 맞다. 그렇다고 이론이라는 것에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이론적 실천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론 아니면 실기, 이런 양자택일의 혐의는 기제 자체가 고장 났을뿐더러 실기에 대한 나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한다. 여기에는 더욱 복잡한 실천에 대한 욕망이 있다.

무릇 실천 행위로서의 이론이 거의 불가능해 ‘ 보인다’라는 정황도 선택에 영향을 미쳤음을 먼저 인정해야겠다. 이론적 실천의 구체적인 예로 비평의 실천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비평의 위기’라는 지겨운 진단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다. 물론 지금껏 정전화되면서도 유령으로 풍화되는 비평장을 지적하며, 이를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고 제도 바깥에서 대안적 시도를 활성화한 이들이 있다. 나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유사한 네트워크를 지속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실기를 하고 싶다’ 내지는 ‘배우고 싶다’라는 욕망을 택했다. 나는 이를 ‘현장’과 ‘속도’에 대한 욕망으로 바꿔 읽을 것을 제안하고 싶다. 모든 이론과가 현장의 부재를 체감할지는 모르겠다. 전통적 가이드라인대로 각 분야에 맞는 특정 지면을 확보하거나 평론가로 등단할 수도 있고, 또는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에 정진하는 식으로 기존의 ‘현장(field)’을 재수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현장 바깥의 현장’을 상상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장’이 가능한가? 더 정확히는, 동시적으로 작동하는가? ‘현장 바깥의 현장’이 제도를 반으로 접어 이곳저곳 구멍을 뚫는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도 부분적 자격 검증과 게이트 키핑이라는 권력 분배의 문제, 빈사의 빈사라는 이중의 곤경 등, 동시적 감각을 불가능해지도록 만드는 필연적 제한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물론 또 다른 현장의 도입을 목표로 하지 않고, 제도의 도움 없이 새로운 동시성을 발굴하는 방향으로 동시성 자체를 ‘현장’으로서 상상해 볼 순 있겠다.

하지만, 결정적인 점은 현장을 제쳐두고 오직 ‘동시성’을 염두에 둘 때, 내게 ‘이론하기’보다는 ‘실기하기’가 더 수월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실기 행위는 (대개 본질적으로 후행적인 이론의 엇박보다는) 현장 바깥에서 빠르게 자신을 좌표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론의 현장 바깥이 엄격한 자격을 요하는 학술장에 여러 종류의 ‘구멍 내기’로 동시라는 감각을 방류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나는 실기의 현장이 비교적 뚜렷한 만큼 그것의 바깥을 더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기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영화/영상을 만드는 편이 더 빨라 보였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한국 단편 경쟁 심사평에서는, 단적인 결론이고 일반화할 수 없는 수치에 기대고 있지만, 한국 독립 영화를 보는 사람보다 독립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더 많아졌음을 지적한다. 올해 출품 수는 1,500편가량이었다. 나는 이 진단을 단순히 여기지 않고 나의 욕망이 전향한 자리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하는 기회로 삼고 싶다. 구체적이지만 추상적 집단으로 이해되는 이 숫자를, 제도/현장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분석 위로, 그곳에 ‘개입’하고자 하는 여러 동료의 욕망으로 겹쳐 읽는다. 그 숫자는 단순히 선택되고 승인되기 위한 경쟁률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에 대한 욕망의 방향을 조정하거나 제도를 우회하는 방법을 통해 경로를 새로 그리는 기회로 전환될 수 있다. 즉, 제도의 울타리 옆에 새로운 담론장을 두르거나 혹은 누구나 오를 수 있는 단상을 설치할 수도 있겠지만, 울타리 주변을 기웃거리며 가끔 그것을 쿡 찌르는 동료들 속에서 우선 그들을 따라해 볼 수도 있다. 동시에 그들의 구멍에도 손가락을 찔러 넣어보고 꼭 이 구멍이어야 하는지, 구멍이 필요한지 질문해 가며 그들의 구멍과 나의 구멍에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어떤 것의 바깥’을 상상하는 시도는 스스로 견고하지 못하다. 애초에 여집합은 부분과의 관계를 통해 정립되며, 그 부분이라는 현장조차 그곳을 향하는 욕망 덕분에 구획된다. 현장은 상상된 구조적 관계로서 존재한다. 그럼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곳을 향하는 욕망이다. 1,500이라는 숫자는 제도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제도 바깥을 지시한다. 동일한 숫자는 상상된 집적이 아니라 미시적인 차원의 욕망들로 분열한다. 이 욕망들을 상상된 틀에 겹쳐두고서 편입의 욕망으로 가위질하는 대신 그것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 개입하려는 힘으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각각의 욕망마다 변화에 대한 심원한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물며 그것이 편입에 가까운 욕망일지라도 그러한 욕망을 개입으로 다시 읽어볼 의지를 발휘할 수도 있다.

이 타이밍에 환기할 만한 점이 하나 있다. 실기로서의 실천이 이론으로부터 이탈하였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순환 모델을 아예 폐기하자고 주장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이 모델에는 현실적으로 선순환이 불가하게 만드는 순진한 면이 있고, 그것은 어느 지점에서 실천에 대한 욕망을 적체시킨다. 하지만 모델의 주장에 나는 여전히 동의한다. 이론은 늘 실천적 맥락을 동원하며, 실천 또한 이론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여, 그것의 자장 안에서 동시에 자장을 구부리며 전개되어야 한다. 특히 예술은 그래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에 우리 모두 합의한다면, 비슷한 듯 다른 의제인 ‘예술’과 ‘운동’의 겹침과 불화에서도 참조할 수 있는 혜안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실천’의 외연은 계속해서 다른 맥락 속에서 분열하지만, 실천의 반대를 무엇으로 상정하든 간에 결국 그것의 반대에 상정되는 모든 것을 실천 속에서 파악하며, 그 반대 항들의 계열을, 계열 간의 관계성을 추적해 나가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문제는, 실기를 하며 어떻게 이론적 태도를 져버리지 않고서 ‘실천’을 하느냐이다.

지금껏 이론을 말하며 함께 사용한 ‘한다, 참조한다, 동원한다’ 등의 동사와 서술어를 정확히 풀어보는 방향으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언급한 동사와 서술어들이 예술사나 미학 공부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혹은 특정한 이론을 뭉텅 잘라 그대로 작업에 이식하는 방법의 실행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물론 이론이 실기의 실천에 대한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처럼 작동하며 접근 가능하도록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현상이 매우 당연하며, 모델의 선순환을 위해서는 당위적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것은 이론의 주요 역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실기’를 하며 어떻게 이론적 원천을 현행화할 것인지, 이를 고민할 때는 이론의 역할이 특정적이고 세부적이어야 한다. 역사를 읊는 일보다 훨씬 실용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내가 반복적으로 언급한, 이론적 실천으로 거론된 ‘비평’이라는 한 형태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모두 비평문을 써야 한다는 결론은 아니고(글쓰기의 의미가 갈수록 퇴보하는 이 시대에 그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다만 ‘비평’이 몇몇 실기과에서 ‘ 크리틱(critic)’이라고 일컬어지는 상호 동료 간의 피드백에 구체적인 참조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2

비평은 단순히 텍스트 분석에 기반한 ‘의미화’ 작업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는 크리틱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어떤 작업에 대한 구조화와 범주 설정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개념과 이론의 체계를 빌려올 수밖에 없다. 좋다, 싫다 식의 가치판단만으로는 크리틱이라고 할 수 없으며, 가치판단을 통하더라도 그것이 왜 좋고 싫은지에 관한 논리와 쟁의가 있어야 최소한 크리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게 동료 크리틱이 귀중한 이유는 이러한 이론적 범주와 경계 설정이 지리멸렬한 차원에서 동시적인 감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작업뿐만 아니라 크리틱 과정 자체가 당연해 보이는 전제를 전혀 다른 국면으로 경험시키거나, 그렇게 전제 자체를 의문에 부쳐 논리를 새롭게 만든다. 물러난 줄 알았던 이론은 잘게 부서져 그렇게 실천의 가장자리에 하나의 형상으로 몰려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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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인 예이지만, 실기과에서 ‘크리틱’이라고 불리는 과정을 대개 ‘비평’적 개입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비평과 비슷한(단언하자면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론적 실천으로서의 ‘비평’은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글 윤병현
다소 순진하게 대체로 비관적으로 공부합니다(=삽니다). 영상이론과 조형예술을 따로 또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허투루하고 싶지 않지만 모든 것이 정교하진 못합니다. 이 글을 작성하며 경험과 생각을 나눠준 동료들에게 감사와 애정을 부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