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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재우고, 남편이 오기까지 책을 읽는 소라. 언젠가부터 무언가를 읽고 보기 위해서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 한다는 사실이 당연해졌기에, 어둠 속에서 책을 읽는 이 장면에서 서글픔이 느껴진다. 영화 〈그래도 사랑해〉의 스틸, ©영화사 달골짜기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해야하는 것1
:영화 〈그래도 사랑해〉

유도리2, 어쩌면 서글픈 융통성

극도의 N(직관형)성향3을 가진 나는, 가끔 무의미한 가상의 상황을 떠올리고 그에 몰입한다. 이를테면 이 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쉽게 얻을 수 없는 어떤 기회가 왔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며칠인지도 모를 밤을 새우고, 가끔 제멋대로 빠르게 뛰었다가 갑자기 느려졌다가 하는 맥박을 어르고 달래가며 작업을 완성한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첫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태어난 적도 없는) 나의 일곱 살 아이가 유치원에서 크게 다친다(고 가정해 보자). 친구와 놀다 머리에서 피가 줄줄 나 응급실에 실려 갔단다. 자,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로서 달려갈까, 작가로서 자리를 지킬까?

그러나 삶은 나에게 S(감각형)적 사고방식을 배우게 했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고 할 만한 건 딱히 없으며, 내가 잠깐 미뤄둔다고 어떤 일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는 상황도 웬만하면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주변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연관된 수많은 사람이 뛰어들 테고, 이런 비상의 상황에 ‘유도리’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그 또한 누군가의 가족이기에, 일정을 미뤄주거나 아이를 대신 봐주는 등 선의와 기지를 발휘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주 크지 않은, ‘다소 곤란한’ 정도의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의 삶엔 대체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래도 사랑’할 수 있도록 삶은 부단히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현실의 배움은 나에게 위안과 공포를 동시에 심어주었다. 어떤 상황도 결국 헤쳐나갈 수 있다는 위안, 하지만 그렇게 얼렁뚱땅의 방식으로 예술이 생활이 공존할 수 있다면, 끝내 내가 불릴 이름은 무엇일까 하는 공포. 나는 약간 불성실하다고 여겨지는 작가일까, 혹은 가슴 깊은 데에 미안함을 갖고 사는 이기적인 엄마가 될까? 복잡한 일정을 묵묵히 소화하는 예술가? 아니면,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뭐든 그럭저럭 해내는 대견하지만 미심쩍은 딸인가?

1
레이먼드 카버의 대표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1981)의 제목을 변주.
2
‘여유’를 뜻하는 일본어 ‘ゆとり(유토리)’에서 비롯된 말로 ‘여유’, ‘ 융통’으로 다듬어져 쓰인다.
3
성격 유형 검사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척도에서 N(직관형)과 S(감각형)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로 갈린다. N(직관형)은 전체적인 그림, 가능성, 미래에 집중해 패턴과 연관성을 찾으려 하고, S(감각형)은 오감으로 받아들인 구체적인 사실과 현재의 경험을 중시한다.

별일, 한판, 또는 액땜–
연극이 삶이 될 수 있다면, 삶도 연극이 될 수 있을까?

영화 〈그래도 사랑해〉의 두 인물, 준석과 소라는 이 질문 어딘가에 갇혀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영화의 첫 장면은 병원에 다녀온 아이를 재운 후, 책을 읽고 있는 소라에서 시작한다. 그녀가 오늘 책을 읽고 싶은 만큼 읽었을까, 하는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남편 준석이 귀가한다. 그런데 오늘 소라에게는 ‘별일’이 있었다. ‘엄마가 연극을 한다는 말을 듣고 아이가 아픈 것 아니냐’는 시모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라는 제의받은 연극 작업에 참여할 수 있을지 여부가 아직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다. 준석의 어머니, 소라의 시어머니는 아이가 아픈 것을 두고 ‘액땜’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날의 ‘한판’으로 이어졌다.

준석과 소라는 28개월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연극인 부부로, 아이를 예뻐하면서도 각자의 일을 또한 놓지 않기 위해 열심이다. 가족과 갈등이 생겨도 덮어두고 모르는 체하지 않는 다정한 이들이다.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도 가족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전화를 걸고, 상대가 응답하지 않는 영상 통화를 건다. 전세로 구한 집, 운이 좋으면 1년에 세 번쯤 만나는 무대, 그리고 아이 하나를 키워야 하는 3인 가족의 생계까지. 이들 삶의 양태는 단단한 알맹이보다는 여러 곳에 느슨하게 퍼져 있는 고체와 액체의 중간 상태처럼 느껴진다. 뭐랄까, 이를테면 슬라임 같은?

사건을 설계하고, 인물의 생애를 상상하고, 몇 개의 막을 나눌 때. 내 삶이 연극이라면, 지금은 두 시간짜리 공연(그런데 러닝타임이 두 시간이나 될까?)에서 몇 분쯤 지난 시점일지 가끔 생각한다. 이상하게 스무 살에도, 서른을 넘긴 현재까지도 항상 ‘지금’은 아직 제대로 갈등이 등장하지도 않은 초반부 어디쯤인 것 같다고 느낀다. 99%의 일상과 1%의 이벤트 같은 것으로 이어지는 삶이라서일까, 일상에는 절정과 위기가 없다고 쉽게 치부해 버린다. 나 역시 물건이라면, 잘 굴러가는 단단한 돌멩이는 아니겠다. 역시 여러 군데로 푹 퍼지기 좋은 슬라임 같으려나.

대단한 비극, 비장한 대서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계의 흥망성쇠를 책임질 절대 반지 정도는 파괴하러 가야 한다. 혹은 왕좌를 두고 부모 형제와 피 튀기며 싸워야 한다. 그 정도의 일은 있어야 세상의 진실을 담아낼 수 있다고 믿으며, 일주일에 한 번은 안부 전화를 하라는 엄마와의 통화를 한 시간째 끊지 못하는 나의 일상은 세상을 구하는 서사와는 멀어도 너무 멀다. 그런데, 현실의 삶은 정말 연극이 될 수 없을까? 그럴듯한 극적 갈등을 만들어내기엔 너무나도 지루하고 단조롭고, 그래서 평화로운 걸까?

소라와 준석의 삶이 이어지는 공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초반부터 대단한 ‘사건’이 벌어질 긴장감은 풍기지 않는다. 나의 거실, 가족, 일상이 연극의 한 장면이 될 수 없다고 믿어왔기에, 아이의 서투른 읊조림과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리는 그들의 집 역시 대서사의 무대로 적절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 부부에게는 동시에 각각 연극 무대에 설 기회가 찾아왔다. 문제는 돌봐야 할 아이와 생계의 부담 때문에, 두 사람 모두가 작업에 참여할 수는 없다. 결국 둘 중 한 명만 기회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 이에 두 사람은 이 집을 무대로 바꾼다. 이번에는 누가 연극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부부는 서로를 심사위원이자 경쟁자로 만드는 자체 오디션을 벌인다.

첫 만남의 날을 재현하는 둘. 둘이 치르는 첫 번째 자체 오디션이다. 영화 〈그래도 사랑해〉의 스틸, ©영화사 달골짜기

농담 같은 첫 번째 오디션

준석의 제안으로 시작된 오디션에서, 그들이 연기하기로 선택한 장면은 둘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이뤄진 날이다. 옆방에 아이를 재워둔 채, 두 사람이 보여주는 연기는 실제 첫날의 상황과 유사하다. 애초에 이 장면을 고른 것부터가 약간은 장난스러운 선택이기도 하다. 두 사람 모두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함께 쌓아온 시간을 통해 그때 서로의 말과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오디션은 준석이 참여하고자 하는 극단 ‘이스케이프’의 차기작, 그리고 소라가 더블캐스팅으로 참여하게 될 연극 그 두 작품 중 어느 것과도 가깝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둘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둘 중 연기를 더 잘하는 사람이 무대에 오르기로 하고 펼쳐지는 연기 대결이지만, 그 결과는 대체 누가 판단한다는 것일까?

장면 연기가 끝나고, 이제 판단할 시간이다. 누가 더 잘 연기했는지, 왜 이번은 본인의 차례여야만 하는지, 누구의 꿈을 지켜야 하는지. 그런 대화들이 이어지며 극적인 대립이 본격화할 것이라 예상되던 그때, 준석은 갑자기 연기를 멈추고 첫날의 상황에 대해 질문한다. 대략 그날 소라의 행동이 말이 되지 않았다는 뉘앙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둘의 대화는 오디션과 실제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는다. 그리고 ‘둘 다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결과는 미정이다. 때마침 잠든 줄 알았던 아이가 운다. 다시 일상이 흘러가고, 다음 끼니의 시간이 다가온다. 관객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이 농담 같은 오디션은 대체 왜 하는 거지?

두 번째 오디션, 그리고 게임

첫 오디션은 생활의 시간에 의해 끊겼다. 결과는 유예된 채, 부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 오디션이 있기 전, 약간의 갈등(이 될 뻔한) 장면이 벌어진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와, 갈등을 이야기할 때의 온도가 퍽 다르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다. 쉽게 싸움이 될 뻔했던 지난 갈등이 오디션이 되었고, 게다가 그 오디션도 농담처럼 진행돼서였을까? 분명 그들 사이에 미묘한 실금이 보이는데, 두 사람은 또다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다.

두 번째 오디션이 열린 곳은 집 마당. 객석엔 집들이에 참여한 연극인 동료들, 조명은 오후의 햇살이다. 카메라 또한 연극인 동료들의 시야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어, 관객은 집들이에 참여한 지인 중 한 명의 시야로 두 번째 오디션을 관전하게 된다. 이번에 두 사람이 택한 장면은 첫 번의 오디션보다는 극적인 상황이다. 떠나려는 여자와 붙잡는 남자. 누가 더 연기를 잘했는지 가리자고 해놓곤, 누가 더 오래 이 상황을 버티는지를 두고 게임을 하는 것 같다. 소라가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는데, 동료들은 장난처럼 〈붙잡고도〉의 코러스를 얹는다. 관객들이 있음에도 판단은 유예된다.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두 번째 오디션, 여전히 농담이 지속되는 중일까?

이어지는 건 ‘당연하지’ 게임이다. 한때 한 예능 프로그램의 코너로 인기를 끌었던, 어떤 질문에도 상대방이 ‘당연하지’로 답해야 하는 이 잔인한 게임에 두 사람이 선뜻 참여한다. “너 연기 엄청 하고 싶지?” “너는 더 하고 싶지?” “주변에서 연기 잘한다고 하는 말, 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거 알지?” “네 연기가 제자리걸음이라는 거 너만 모르지?”같은 뼈아픈 질문이 게임의 규칙 아래 웃음으로 통과되는데, 아직도 갈등이 벌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 내가 둘째 임신한 거 모르고 있지?”라는 소라의 마지막 질문에, 농담같던 상황에 살짝 금이 간다. 그러나 이 실금에도 두 사람이 관객과 함께 이어가던 연극적 놀이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사랑과 갈등이 몇 번째 같은 온도로 왕복하는 동안 두 사람은 비극이나 희극의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또다시 생활의 리듬으로 돌아간다.

영화 <그래도 사랑해>가 증명하려는 건 아마 그것. 파국 대신 지속이, 결판 대신 유예가, 절정 대신 호흡이 사랑을 보여주고, 또 가능케 한다는 것. 두 사람의 자체 오디션은 처음부터 모호했다. 심사위원이 누구고 규칙은 무엇이며 판결은 어떻게 내릴 것인지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 걸까? 어쩌면 이 농담 같은 오디션은 무언가를 결론 내기 위해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그래도 사랑’하기 위해 보이는 어떤 ‘태도’인 걸까? 단번에 내려지는 판결이 없지만, 대신 다음 장면을 가능케 하는 문장이 생긴다. 두 사람 간의, 혹은 연극에 대한 각자의 사랑에 필요한 건 정답의 문장이 아니라, 어떻게 다음 장면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이 된 걸까?

영화 〈그래도 사랑해〉의 스틸 ©영화사 달골짜기

사랑을 말할 때 해야 하는 것,
그리고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

처음의 가정으로 돌아가 본다. 마지막일지 모르는 중요한 기회, 응급실에 간 아이, 그 어려움 속에서 발휘하는 융통성.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서글펐던 건, 그 ‘유도리’에 기대는 일이 비겁한 회피로 보일까 봐서였다. 더구나 그 순간의 선택이 내가 어떤 존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작동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 준석과 소라는, 사랑이 계속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태도’임을 보여준다. 미뤘다면 돌아오고, 늦었으면 더 천천히 묻는다. 두 사람이 오디션을 거듭하고 서로에게 묻기를 주저하지 않듯이.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건이 없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사건을 유예한다. 파국을 지우지 않되, 그와 함께 생활한다. 아이의 칭얼거림, 오디션 결과 통보, 가족의 전화, 생계를 위한 일. 그 모든 호출은 삶 속에서 우위나 서열 없이 동등하게 이어진다. 높은 톤으로 서로에게 진실을 찔러넣는 대신, 조금 유예하더라도 아이의 숨, 전화의 진동, 밥 짓는 소리 같은 생활의 신호에 맞춰 타이밍을 조절한다. 사랑과 갈등이 같은 온도로 흐를 때, 우리는 농담처럼 살아남는다. 그것이 진실이든 농담이든,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아이와 함께 하는 페인트칠에도 숨이 트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기다렸던 전화 한 통에도 내 세계의 진실이 담길 수 있는데. 그 속에도 세계의 무게를 짊어진 ‘절대 반지’ 못지않은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을까.

“괜찮다. 아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힘들 때면 내뱉는 이 말은 거짓이다. 무언가를 유예하고 말의 온도를 낮추는 동안에도 어떤 일들은 계속 일어난다. 다만 그 일들은 우리를 완전히 부술 만큼 날카롭지 않다. 어떤 날엔 우리는 무용한 말들 가운데에서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용해 보이는 그 말들은 우리를 살아가게 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

영화가 고백하는, ‘그래도 사랑한다’라는 건 뭘까? 거대한 서사 없이도,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특별한 힘이 있을까? 영화가 끝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파국 대신 다시 사랑하기를 택하기. 결판 대신 또 한 번의 오디션을 치르기. 사랑을 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 오로지 사랑을 계속하기로 선택하는 일이다.

글 신소원
지난여름, 입학 8년 차에 드디어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를 졸업했다. 늦게 졸업한 만큼, 더 오래 머물고 싶은 세계가 있다. 무대와 화면, 그 사이를 오가며 이어지는 이야기를 계속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