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가 있다. 네모 안에 사람이 있다. 우리는 늘 작든 크든 네모 속에서 살아간다. 네모는 여러 ‘말’로 이루어져 있다. 나를 에우고 있는 말들 가운데에서 나는 아늑하다. 그러나 그 안락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네모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인지하고 나면 그곳은 지옥1이 된다. 말이 깰 수 없는 규칙이 되어 나를 옭아맨다. 하지만 네모가 딱딱하지 않고 사실은 흐물흐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비로소 흐물흐물한 벽을 통과해 나와, 네모 밖에서 네모를 본다. 그 모양은 애초에 네모도 아니었고, 심지어 실체도 없다. 나를 편안하게 혹은 두렵게 만들었던 네모에 연민을 느끼게 된다. 각자 자신만의 네모를 두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네모에 손을 뻗어보아야 한다. 네모의 가장자리로 걸어가야만 한다. 안전한 중앙이 아니라.
말의 벽
음악에도 네모가 있다. 음악을 두고 우리는 여러 ‘말’을 한다. 그렇게 음악을 에우고 네모를 짓는다. 장르명, 제목, 비평, 해설, 감상, 수식어, 역사. 어떤 이름으로 네모를 만들고 나면, 그것은 규칙이 되어 음악을 옭아맨다. 그러나 네모에 얽매이지 않고 바깥에 잔존하는 음악들이 있다. 스스로가 밖에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특히나 대중음악에는 네모 밖에 머무는, 그러니까 단단한 개념의 울타리로 둘러쌀 수 없는 음악들이 많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그러한 음악들을 감쌀 수 있는 또 다른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말을 던진다. 때로는 우연히 던진 말이 네모를 강력하게 지탱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대한이 “대중음악에서의 이름은 자주 별 이유 없이 붙여진다.”2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한 이유로 전대한은 대중음악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 별 이유 없는 이름이 대중음악에 붙었을 때, 붙은 대로 살자는 입장과 그 이름의 정당성을 엄밀하게 따져보자는 입장이 있을 수 있겠는데, 전대한은 분명하게 후자다. 그 배경은 그가 분석철학을 공부했다는 데 있다.3 대개 분석철학에서 그러하듯, 전대한은 언어를 통한 명료하고 분명한 논증을 추구한다. 새로운 이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대중음악에서 그는 도대체 그 말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왜 그런 말들이 필요한 것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전대한은 대중음악을 둘러싼 네모 바깥에서 그 ‘말의 벽’을 파헤쳐보고자 했다. 실체 없는 말들 속에서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언어의 그물망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는 본론의 세 부분 중 첫 번째로 ‘이름’에 관하여 썼다. 그 부분에서 다룬 이름들이 ‘PC Music, 버블검베이스, 하이퍼팝, 콘셉트로니카,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노이즈음악’ 등이다.
1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가져왔다. 실제 구절은
희곡 『닫힌 방』에 나오는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며, 인간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불안정함 때문에 인간은 타인의 말과
시선에 기대어 자신을 규정하려 한다. 이때 타인은 나를 하나의
대상으로 고정하고, 그 순간 자유로운 실존은 제약을 받는다. 따라서
타인이 지옥이 되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
실존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전대한의 음악 비평집에서 다루어지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장르명이나 비평의 규정적 용어들은 그 음악
장르의 본질이 고정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사실은 임의적인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2
전대한, 『비개념원리: 전대한 대중음악비평집』, 쪽프레스(2025),
115p. 이하 인용시 본문에 페이지만 표기.
3
전대한은 서울대학교에서 분석미학을 공부했다. 논문 「지각 경험의
내용은 개념적인가 아니면 비개념적인가? -양립 모델로서의 이중 과정
이론에 대한 옹호」를 썼다. 지각과 인지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탐구하며, 대중음악을 분석적인 언어와 방법으로 비평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논리로 짓는 새 비평
전대한이 책 전체를 통틀어 즐겨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축자적’이다. 영어로는 ‘literal’인데, 글자 하나하나를 좇아 충실하게 풀이하는 태도를 뜻한다. 그는 문장을 당위, 사실, 가치, 주장, 존재 등으로 세분화하고, 실제 문장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섞여 쓰이는지를 살펴본다. 그러다 보니 책 곳곳에서 양화사나 지시사, 귀추법과 같은 논리학의 용어가 반복된다. 이러한 단어들이 독자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으나, 전대한은 그것들을 논리의 도구로 삼아 명제나 자신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확인한다. 직관과 명제 사이에 괴리가 있다면, 추론을 거쳐 그 차이를 좁히고 명료한 언어에 도달하려 한다.
예를 들자면, A.G. 쿡이나 소피, 케로케로 보니토, 100 겍스가 들려주는 음악을 두고 새로운 장르명이 필요해졌다. 여러 후보 가운데 전대한은 ‘하이퍼팝(Hyper Pop)’이라는 장르명이 그에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그는 하이퍼팝이라는 장르명의 축자적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논증을 시작한다. ‘Hyper’와 ‘Pop’으로 나누었을 때, ‘Hyper’의 의미를 ‘X가 과잉인’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실제로 무언가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과잉이기 때문이 아니라, 과잉의 감각을 환기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장르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줄 근거로 그는 미국의 철학자 프레드 드레츠키(Fred Dretske)의 인간의 지각과 인지 과정에 관한 이론을 활용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지각할 때 풍부한 정보를 그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언제나 정보가 압축되거나 소실된 채로 전달된다는 것이 드레츠키의 이론이다. 그리고 전대한은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을 통해 무언가가 과잉인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우리로 하여금 인지 과정에서 부호화로 손실된(더 엄밀하게는 손실되었다고 추정되는) 정보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과잉의 (상태를 재현하고 상기시키는) 팝’을 나타내는 데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은 유의미하다.”(45p)라고 명료한 추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 이론이 그의 주장에 꼭 들어맞는지는 의문스럽다. 손실된 정보라는 건 사실 ‘과잉’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음악(예를 들면 혼자 부르는 〈섬집 아기〉)을 들을 때나, 상대적으로 복잡한 말러의 교향곡을 들을 때나 인지 과정에서의 ‘손실’은 어김없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전대한이 주장하는 ‘손실되었다고 추정되는 정보’가 반드시 극단적으로 높인 음고이거나 각종 소리 효과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이퍼팝’이라는 장르명이 적합하다는 그의 주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의 연결고리가 다소 모호하다는 것이다.
물론 전대한의 비평이 보여주듯, 그의 주장 역시 결국 하나의 ‘진술’에 불과하다. 그는 발신했고 우리는 수신했다. 동의할지, 동의하지 않을지는 독자인 우리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의 비동의 역시 하나의 반응이자 또 다른 진술일 뿐이며, 전대한 자신도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글은 언제나 반박이나 미동의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독자의 동의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전대한의 비평은 하나의 진리를 확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장과 근거를 논리적으로 추적하는 데 집중한다. 이 점에서 기존의 음악 비평과는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기존의 음악 비평은 작곡가의 의도나 음악의 스토리 찾기 게임으로 행해질 때가 많았다. 전대한 또한 ‘음악적 허구를 위한 정초 놓기’라는 제목 아래 이를 지적한다. 그는 이민휘의 음악을 예로 들면서, 그의 음악이 하나의 이야기로 환원되는 현상, 그리고 비평에서조차 음악에서 이야기를 추론해 내려는 습관을 비판한다. 그는 “기존 비평은 이야기가 곡 안에 이미 고정되어 숨어 있다고 봄으로써 청자는 감추어진 정답을 유추하는 수동적 해석자에 머물지만, 새 비평은 청자가 음악이 건네준 소도구로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창조한다고 본다.”(217p)라고 말한다. 이는 비평을 곡에 이미 주어진 의미를 확인하는 글이 아니라, 논리적 논증을 통해 음악이 여는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탐구하는 글로 바꾸려는 시도라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전대한은 네모 바깥보다 더 먼 곳에서 대중음악을 바라보았다. 인간과 음악을 둘러싼 네모가 3차원 입체의 세상이라면, 전대한은 4차원 테서랙트(Tesseract)의 세상에서 그것을 관찰하려 했다. 사실 그의 글에는 근본적으로 불신이 깔려 있다. 그는 음악을 둘러싼 모든 언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삐딱한 태도로 글을 썼다. 대중음악 그 자체보다 대중음악을 말하는 방식에 천착했던 이유도, 그 언어들이 실제보다 더 견고한 실체처럼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언어들에 거리를 두고 보려고 했고, 음악을 곧바로 서술하기보다 메타적으로 반추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나는 그의 일을, ‘말’의 쓰임을 엄격하게 따져보면서 “수고스럽게 복잡한 사고”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4 그의 일은 음악을 말하는 언어가 얼마나 임시적이고 불안정한지 드러내면서, 그 언어를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실패를 염두에 두고, 아니, 실패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점에서 그의 비평은 독특하다.
비개념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음악비평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혹은 ‘쓸 수 없는 것을 쓰기’를 수반하는데, 이렇게 자체로 모순인 수행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논증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아마 이러한 이유에서 숱한 음악비평 작업들이 여지껏 의미를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는 온갖 이론을 두른 채 애매모호한 진술을 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처지도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타협하고 싶지는 않다. (중략) 그러므로 나의 음악비평은 필연적으로 미끄러지고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음악을 듣고 음악에 관하여 말하고 쓰고자 한다. 비개념을 개념화하겠다는 모순을 껴안고서(10~11p).
그는 대중음악을 둘러싼 네모난 말들에 압도되지 않고 가장자리로 걸어가 손을 뻗어본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말의 벽’이 다소 허구적일 뿐 아니라 유연하고, 다채로운 확장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4
이 문장의 인용구는 룰러 밀러의 도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곰출판, 2021) 247p.에서 가져왔다. 흥미롭게도 이 책 또한
전대한의 비평집과 비슷하게, 물고기 종을 구분하는 ‘이름’들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글 배현지
음악원 음악학과 예술사 재학중. 전대한처럼 음악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데 흥미가 있다. 직관을 믿되, 때로는 그 직관을 의심하며
음악에 대한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