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2025 AUTUMN55

끈적하고 더럽고
보고 싶은 얼룩들

대자보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대자보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기 때문이고, 형식적으로 매우 반미학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자보의 글이 시나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에 좋았다. 직설적이고 명확하며 효율적인 어투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대자보가 박스 테이프나 청테이프로 붙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다.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기를 거부한다는 점이 흐뭇했다. 한마디로 내가 대자보에 끌렸던 이유는 정치성이었고, 나에게 그 정치성은 반미학성과 동의어였다. 그런 대자보와 현실을 관찰하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만남은 유일하게 구미가 돋는 창작 활동이었다. 나는 대자보를 소재 삼아서 가장 리얼리즘적이고 유물론적이며 못생긴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다짐한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았던 지난 3월의 첫째 주, 그러니까 2025년 봄학기가 개강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시점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친구가 당황한 목소리로 어떤 학교 직원 한 명이 영상원 1층의 대자보를 전부 떼고 있다는 따끈한 목격담을 말해주었다. 직원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위에서 시켰다’라고만 답했다고 했다. 그날, 손쓸 새도 없이 연극원과 영상원 1층 외벽과 건물 안의 대자보가 전부 사라졌다.1 미술원의 몇몇 알림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분개했다. 일방적으로 대자보를 철거하는 학교의 고압적인 태도 때문만 아니라, 내가 촬영할 대상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대자보를 마구잡이로 찍기 시작했다. 대자보가 떼어지면 다시는 볼 수도 없고 찍지도 못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캠코더와 삼각대 하나씩을 들고 석관동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눈에 들어오는 대자보들의 풀샷을 찍었다. 아직 복도 벽과 바닥, 계단, 엘리베이터, 흡연 부스, 화장실, 과방의 책상이나 의자 등 다양한 곳에 대자보와 관련된 스티커들이 남아 있었다. 이것들이 없어지기 전에 그 안에 적힌 문장들과 부착된 장소를 제대로 남길 수 있는 자료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해야 했다. 대자보를 위한 가장 완벽한 영정사진은 고화질의 풀샷이었다.

이렇게 두어 번에 걸친 빠른 촬영을 마친 후, 간단히 편집했다. 그런데 편집을 마치고 나니 대자보와 스티커를 가장 완벽하고 확실하게 기록한 나의 푸티지들은 모두 합쳐져 지루하고 진부한 시퀀스가 되어 있었다. 어딘가 평평한 곳에 붙은 납작한 종이와 그 위의 빼곡한 글씨들로 이루어진 이미지들은 영상이라기보다는 몇 분마다 바뀌는 글의 연속에 가까웠다. 즉 이 영상은 책에 가까운 형식이었지만, 책만은 못한 영상이었다. 당황했다. 강력한 글을 모았으나, 그 내용도 힘도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자보를 제대로 재현하려면, 무언가 달라져야 했다.

나는 대자보의 반미학성에 끌렸다는 계기가 무색할 정도로 ‘미학적인’ 화면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이후 촬영에서는 미술관이나 실험영화제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온갖 카메라 워킹을 시도해 보았다. 카메라를 마구 흔들고, 조리개를 여닫으며 명도를 극단적으로 조정하거나, 초근접 샷을 찍거나, 초점을 완전히 나가게 해 보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새롭게 시도한 대부분의 촬영본도 대자보를 제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한 번은 복도를 걸어가다가 바닥에 붙어 있는 자보를 보았다. 그 자보 위에는 테이프가 덕지덕지 발려 있었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일부 뜯겨나가 큰 구멍이 생겨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구멍 안으로 계속해서 줌인해 보았다. 그러자 그 구멍 안에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고 더러운 종이 쪼가리 몇 놈이 바닥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것이 드러났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종이가 사람들의 수많은 발걸음에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거지? 이 자보의 사라짐 속에는 사라지지 않음이 있었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된 순간, 재현할 줄 몰랐던 것을 재현하게 된 순간이었다. 뭔가 비슷한 걸 더 찍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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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취재해 보니 이는 연극원장 회의에서 일방적으로 매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대자보를 전부 다 청소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연극원의 학생들은 지난겨울부터 불법 계엄령뿐만 아니라 P교수와 K교수, 두 차례의 미투 사건을 공론화하며 많은 대자보를 대대적으로 부착했다. 대자보를 쓰고 부착한 주체인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결정하거나 대처할 시간도 기회도 없이, 그들이 학교의 외벽에, 복도에 만들어 둔 공론장은 갑작스럽게 파괴되었다. 이에 한예종 인권위와 연극원 비대위가 함께 대응하고 있다. 그럼에도 3월부터 6월까지, 채 사 개월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촬영한 대자보와 스티커 중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많아졌다. 비단 연극원과 영상원뿐만 아니라, 석관캠퍼스의 거의 모든 건물에서 마찬가지였다.

다큐멘터리 〈스티커와 대자보〉(2025)의 스틸 ©김선진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벽에 청테이프로 붙인 커다란 대자보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가 벽으로부터 들떠 있는 걸 발견했다. 시각적으로 가벼운 흥미를 느끼고 곧바로 캠코더로 줌인해 녹화했다. 그러나 이렇게 정적인 대상을 찍을 때 그 3~5분의 시간은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가만히 서서 1부터 180까지 숫자를 세는 기분이 든다. 이때에도 멍하니 점멸하는 빨간 동그라미(레코드 표시) 옆의 분초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나는 이 대자보의 한쪽 귀퉁이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숨을 쉬듯, 종이가 벽으로 살짝 다가가다가 앞으로 몸을 말아 올리듯 벽에서 멀어졌다. 그러고선 부드러운 공기의 저항을 받으며 다시 벽 쪽으로 조금 물러났다. 종이의 밑 부분에 기다랗게 붙어 있지만 끈끈이의 쓸모를 다한 청테이프도 종이의 움직임을 따라 앞뒤로 같이 움직였고, 청테이프 특유의 약간 오돌토돌하고 코팅된 표면은 그때마다 복도 형광등의 빛을 다르게 반사했다. 종이의 귀퉁이가 앞으로 살짝 나서면 테이프 표면의 요철을 드러내는 반짝임의 조각들이 미세하게 왼쪽으로 옮겨 갔고, 종이가 몸을 빼면 그 빛들은 미세하게 오른편으로 돌아왔다. 뒤편의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움직임에 맞추어 조금씩 짧아졌다가 길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러한 종이와 빛과 그림자의 짧고 빠른 떨림을, 나는 그것을 촬영하고 있기 때문에 보았다.

이때 나는 그 어떤 대자보도 벽에 완벽하게 붙어있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대자보의 내용, 즉 적힌 문장보다 그 주위에 두른 테이프, 그 테이프에 붙은 먼지, 종이가 구겨지고 찢어진 흔적, 그래서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뻥 뚫린 단어들, 불균형하게 빛이 더 바래거나 덜 바랜 부분들을 찍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 천으로 된 현수막 위에 언제부터 놓인 건지 모를 누군가의 머리카락 한 가닥. 흡연 부스 벽에 붙은 채 빗물을 맞아 우글우글하게 울고 바래버린 스티커의 표면. 끈적한 종이의 표면에 붙은 채 꼼짝 못 하고 죽어버렸을 벌레 사체. 반투명한 흰 물감이 흘러내린 듯한 모양으로 알림판에 흔적을 남긴 박스 테이프 끈끈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끈적거렸을지 예상케 하는, 벽의 한 영역을 빽빽하게 채운 검은 먼지. 종이가 찢어졌다가 다시 붙었지만 “ㅅ신체 접촉과 수ㅣ- . ”로만 읽히는 종이의 한 부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죽었습니다”에서 “죽었” 부분이 담뱃불로 지져져 뚫린 구멍. 이때부터 촬영은 기록보다도 관찰과 동의어가 되었다. 차츰 관찰할 수 있었다. 대자보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들을, 온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글 전문의 명확성이 아니라 이제는 절대 다시 읽을 수 없는 불확실성을, 현존이 아니라 사라짐을.

©김선진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벽과 바닥을 클로즈업하는 과정에서 나는 대자보와 스티커들이 학교 곳곳에 남겨 놓은 얼룩과, 그러한 얼룩을 문제 삼는 학교 당국의 공고문을 점점 더 많이 발견했다. 학교는 대자보와 스티커를 흔적만으로 축소하고 싶어 하는 동시에, 이 흔적 자체에 고통받고 있었다. 학교는 청소에 집착하고 있었다. ‘부착물 금지’와 ‘테이프 금지’를 부르짖는 이유로는 ‘미화원이 깨끗이 떼어 버리기 힘들다’며 청소 노동자의 ‘고충’을 자주 동원했고 말이다.

이런 자국들이 내게는 대자보가 사라진 흔적이었는데, 학교에게는 대자보가 남아있는 흔적이었던 것이다. 벽에 남은 테이프 자국이나 그 위에 붙은 먼지나 종이 쪼가리들은 보기에 흉하다고, 이미 지나가 버린 옛날 일이라고, ‘해결된’ 사안이라고 사라진 흔적이다. 대자보가 전달하던 내용이 더 이상 우리 내부의 것이 아니(여야 한다)라고 단정된 결과다. 그러니까, 이 자국들은 철거가 성공한 결과인데도 여전히 학교가 상정하는 깨끗함이나 보기 좋음으로부터 반대편에 놓여 있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경고문 속에서, 학교는 대자보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해 안달 난 모습이었다.

이제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볼 수 있는, “게시를 승인합니다. 2025.08.25. 영상원” 같은 글이 써진 도장이 귀퉁이에 찍힌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예종의 교칙인 게시물관리규정에 의하면, 명시된 승인 날짜로부터 4주가 지나면 부착한 사람은 종이를 다시 떼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학교 직원을 비롯해 누구나 4주가 지났음을 확인하고 대신 떼어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대자보 허가제가 검열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은 2009년 한예종 사태 때로, 학생들이 학교 본부와 당시 문화부에 비판적인 글을 적극적으로 게시했던 시기다. 이때 학내에 부착하는 모든 게시물은 “교학처장의 승인을 받은 후에 게시”하도록 교칙이 바뀌었다.2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게시물관리규정이 확정된 것은 2012년 하반기다. 2012년은 청소 노동자들이 노조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캠퍼스를 적극적으로 점유했던 해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한예종에서 2012년부터 일해온 청소 노동자 강선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노조가 설립되기 전, 갑질과 착취 아래서 일했던 과거를 “닦고 또 닦아, 새하얗”고 “반짝반짝해서 호텔 같”고 “굉장히 굉장했”던 깨끗함으로 묘사했다. 모든 곳에 쌓인 먼지를 “깨끗이 떼어 버리”던 때는 여성 청소 노동자들이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극심하게 착취당했던 때다. 즉 학교의 벽과 문과 바닥과 화장실이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던 때에, 청소 노동자들은 그 반짝임만큼 착취당했던 것이다. 2012년 상반기, 한예종의 청소 노동자는 학교의 구성원들과 연대해 학교를 점거하고, 시위하고, 선전물을 붙이며 투쟁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현수막을 부착한 바로 다음 날, 용역업체에 책임을 넘기며 결코 청소 노동자를 직고용하지 않던 학교가 대자보를 ‘직접’ 청소했다. 이에 노동자와 학생들은 항의하고 새로운 대자보를 더 많이 부착했다.3 무단 철거가 노학연대를 통해 거센 저항에 부딪히자, 학교는 제도적인 탄압의 방법과 근거를 마련하는 쪽으로 전략을 변경했고, 그 결과가 학생과 노동자들의 문제 제기를 모두 무시한 채 더 공고히 못박은 대자보 허가제4였다.

이러한 역사를 기만하듯, 학교는 온갖 곳에 경고문을 붙여대며 대자보와 스티커를 청소 노동자의 초과 일거리로 덮어씌운다. 그럼에도 나는 강의실과 기숙사 서랍을 비롯해 계속해서 많은 대자보, 현수막, 스티커들의 게릴라가 ‘허가’ 받지 않은 채 학교의 공간을 점유하는 것을 봐왔다. ‘청소’되기를 거부하는 대자보, 스티커, 현수막이 학내 노동 운동과 미투 운동을 가속하고 확장해온 것도 보았다. 언제나 현수막과 대자보는 가장 기본적인 투쟁의 방법이며 아직도 학교로부터 제거를 요청받는 골칫거리다. 학교의 경고문과 승인제 앞에서, 대자보는 ‘엘리트 예술학교’라는 공간을 오염하는 흉물이나 이물질처럼 취급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를 간파해 내듯, 한예종에 대자보와 스티커를 부착하는 사람들은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그것의 반미학성을 ‘예술 학교’라는 정체성과 충돌하게 만든다.

강선자는 예술의전당 부지 안에 있는 서초 캠퍼스에 달았던 현수막에 대해 말해 주었다. 몇 년 전, 서초 캠퍼스에서 일하던 노동조합의 부분회장이 “보기 이쁜 거 말고, 빠알간 천”을 한 장 공수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는 커다란 빨간 천을 받아서 그 위에 검고 굵은 붓글씨로 손수 “총장님 이래도 됩니까” 등의 문구를 적어 넣었다. 발레와 오케스트라 등 고급 예술을 즐기는 곳에 일부러 “삐뚤빼뚤”하고 못생긴 글자로 노골적인 문장을 새긴 것이다. 강선자는 이후 학교 직원으로부터 “제발 떼어주시면 안 될까요” 하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강선자는 그것을 뗄지 말지는 부착한 사람의 마음이라고 답했다.

전시장에 걸려 있는 200년 전 회화처럼 오랫동안 원형을 유지한 채 보존되는 자보는 없다. 한 번 붙은 대자보는 절대 깨끗해지지 않는다. 대자보와 스티커는 오래 갈수록 흉물 같다. 물론 제거되고 나서도 흉물 같다. 대자보는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이야기를 꺼내고, 끈적끈적하고 알록달록해서 조잡하며, 배경에서 튀고, 시간이 지날수록 너덜너덜하고 더러워진다. 뜯긴 자보와 스티커들은 벽에 찰싹 붙어야 보이는 아주 작은 쪼가리나 껌 자국 같은 끈끈이, 스크래치, 얼룩을 남긴다. 대자보의 말들은 사라졌지만, 대자보를 완성하는 물리적 지지체는 남는다. 대자보는 청소되더라도, 청소의 반대편에 있다. 내가 캠코더로 찍은 장면들은 결국 그러한 대자보와 스티커의 존재 방식을 포착한 것일 뿐이었다. 아주 반미학적인 태도를. 그런데 문제는, 캠코더가 재현한 이미지가 내 앞에서 추상화처럼 펼쳐지며 자꾸 쳐다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나는 나뿐만 아니라 이 다큐멘터리의 관람자가 이 자국들을 오랫동안, 꼼꼼히, 마치 회화를 감상하듯 쳐다보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나는 왜 끈적이는 더러운 것들, 머리카락과 먼지와 벌레 사체를, 담배빵을 계속 쳐다보고 싶었던 것일까? 내 방에 있다면 손톱으로 긁어내서라도 깨끗이 하고 싶어질 끈끈이 자국을 왜 그림 같다고 생각하며 바라본 걸까? 왜 오랜 시간 동안 그 이미지의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시각적으로 탐미하게 되었던 것일까? 왜 촬영하고, 촬영본을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왜 그것은 내게 아름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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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한예종에 표현의 자유는 있는가?”, 한예종 누리에 게시된 웹자보, 201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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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돌곶이포럼 부원들이 실시간으로 글을 올려 상황을 공유하곤 했던 돌곶이포럼 트위터(@dorgoziforum)와 페이스북 계정에서 과거 노학연대 투쟁의 생생한 기록과 진행 상황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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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교 당국은 특히 노동자들의 대자보에 반동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이는 다음 해인 2013년, 총무과가 조리 노동자들이 붙인 대자보를 뜯어내 훔쳐 갔던 사건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김선진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영상원 방송영상과의 복도 벽에는 방송영상과 H교수의 위계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대자보와 스티커들이 있다. 2018년부터 재학생, 졸업생, 강사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쓴 연대의 편지와 자보가 계속 덧붙어 커다란 벽면을 여럿 채운 곳이다. 5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 대자보를 붙이는 친구들을 촬영하러 영상원 3층에 갔다가 이 벽면의 대자보들 위에 보라색과 빨간색 마카로 잔뜩 휘갈겨진 낙서를 발견했다. 여성혐오적이고 반페미니즘적인 욕설이 초성으로 적혀 있었다. 아주 빠르게 휘갈긴 것이 분명한 날카롭고 숨 가쁜 스트로크 앞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이나 학교의 청소뿐 아니라, 학내 구성원들 사이의 백래시도 대자보의 생애주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퍼뜩 재확인했다. 그 주 내내 방송영상과의 H교수 미투 대자보가 3회에 걸쳐 욕설과 훼손으로 테러 되었고, 학생들은 3회 이상에 걸쳐 각각의 테러에 대응했다.

대응의 첫 번째는 가해자가 휘갈겨 쓴 여성혐오 욕설 초성을 연대의 언어로 전용한 글귀를 비롯한 연대자보를 잔뜩 적어 붙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크레파스로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문구를 적은 종이를 부착한 것이었다. 또, 그림을 부착함과 동시에 더 이상의 훼손이 일어날 수 없게끔 ‘개인 재산’임을 명확히 한 담요들로 대자보를 가렸다. 모든 연대자보가 학회 소유의 재산이며 훼손 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장도 붙였다. 세 번째는 그 담요 위와 학교 곳곳에 대자보를 지키고 혐오에 맞서겠다는 방송영상과의 공식 입장을 분명히 밝힌 대자보를 다시 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현장에서 첫 번째로 학생들이 곧바로 대응하는 모습을 촬영했고, 이후 며칠간 늦은 밤이나 저녁에 들려오는 나머지 테러 소식을 실시간으로 공유받으며 상황을 주시했다. 이후 학교에 장비를 들고 추가 촬영을 하러 갈 수 있었던 날에는 그간 벌어진 모든 테러와 대응의 반복이 현장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첫인상으로는 “무단 광고물”의 부착을 막기 위해 학교가 내세워온 사유재산의 논리가 대자보 훼손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선택되어야 했다는 점에 속이 쓰렸다. 내부와 외부,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경계를 흐리는 공공재로서의 대자보가 아무도 보지 못하게,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니게 가려진 것도 퍽 마음에 안 들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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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가 훼손된 직후, 방송영상과는 ‘혐오 없는 방송영상과를 위한 TF’를 꾸려 대응했으며, 이들은 2025년 8월 12일, “함께 만드는 기억과 연대의 벽”이라는 행사를 기획해 진행했다. 이날 학생들은 모여서 H교수 미투의 역사와 흐름, 대자보를 둘러싼 훼손과 보존을 기록한 타임라인을 제작해 붙여서 벽을 정비했다. 그리하여 현재 영상원 3층 방송영상과 복도는 구체적인 사진과 글이 포함된 타임라인과 함께 다양한 연대의 종이가 벽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그 담요 주변에 둘러진 스크래치 아트와 종이를 찢어 만든 그림들이 보였다. 크레파스로 종이를 알록달록하게 칠한 후, 그 위를 검정 크레파스로 전부 덮고 뾰족한 것으로 표면을 긁으면 그 선을 따라 색색깔의 화려한 무늬가 드러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연대와 사랑의 말이 적혀 있었다. 또, 크레파스로 드로잉을 그려 넣고 잘게 찢은 종이가 대자보들의 외곽선을 따라서 붙어 있었다. 주로 비정형적인 형태였지만, 섬세하게 찢어 하트, 나무, 청바지 등 구체적인 모양으로 만든 종잇조각도 보였다. 상처 내기와 찢기는 대자보를 공격하는 가장 흔하고 쉬운 방법이다. 특히 페미니즘이나 퀴어 이슈를 다루는 대자보가 이러한 상처를 입는 일은 유구하다. 학생들은 굵은 마카로 대자보에 휘갈겨진 상처(scratch)는 연대의 말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종이를 찢어버리는 훼손은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전용했다. 가해자가 대자보를, 정확히 말하면 대자보가 체현한 페미니즘의 가치를 훼손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들을 효과적으로 빼앗아 온 결과물이었다. 알록달록한 만큼이나 아름다웠고 말이다.

©김선진

나는 이 새로운 형태의 연대자보들을 촬영한 후 최종 편집 과정에 들어갔다. 편집기의 타임라인 위에 철거되거나 훼손된 대자보와 스티커(의 흔적)들과 학생들이 긁고 찢어서 만든 그림이 나란히 놓였다. 나는 그 그림과 글씨가 이전에 찍어왔던 끈끈이의 흔적이나 대자보의 찢기고 깁긴 부분과 매우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 내가 찢기고 떨어져나온 모든 흔적에 끌렸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았다. 대자보의 사라짐과 대자보의 생겨남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앞서 찍어온 불완전한 대자보와 스티커의 이미지를 묘하게 계속해서 쳐다보고 싶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여전히 끈끈하고 더럽고 우연적인, 전면적으로 반미학적인 존재들이라고 여겼다. 그 이미지들은 철거의 결과이기에 대자보와 스티커들의 비극이기도 했다. 계속 이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애당초 대자보의 반미학성에 대한 만족감과 대자보의 사라짐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라짐에 대항하기 위해 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자보의 사라짐이 대자보가 존재하는 조건이었다면? 사라짐=나쁨/보전됨=좋음으로 갈린 구도를 넘어서, 이러한 취약함과 위협들 속에 대자보의 존재 방식이 있었던 것이라면? 그리고 종이의 인쇄력만큼이나 찢어짐과 젖음이, 중력에 저항하는 테이프의 고정력만큼이나 먼지와 때를 끌어당기는 끈적거림이, 바로 대자보와 스티커들이 현존하는 방식이었던 거라면?

이제는 그저 ‘무단 철거와 욕설 테러 앞에서 대자보는 쉽게 사라진다’는 불안감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대자보를 영원히 조심히 보존하자는 이상도 더 이상 믿기 어려웠다. 대자보는 ‘예술적’이거나 ‘미학적’이기를 거부하는 것을 통해 정치성을 전면화한다는 생각도 고집할 수 없었다. 학생들의 그림과 글씨는 사라짐과 생겨남 사이를 오가는 대자보의 존재 조건을 전면화해 재현하며 대자보가 그 안에 지녀온 미학적 형식을 드러냈다.

대자보와 스티커는 부착되는 장소를 지나는 모든 이를 연루시키는 힘을 지니는 만큼, 모두가 자신을 보고 만지기를 허용한다. 이러한 공공성은 대자보를 취약한 동시에 강인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대자보와 스티커는 훼손과 사라짐을 무릅쓰고, 혹은 예상하고 등장한다. 공개적인 곳에 누구나 붙일 수 있고, 그만큼 누구나 연대 포스트잇을 붙이고, 낙서하고, 찢고, 떼고, 다시 이어 붙일 수도 있다. 대자보가 사라진 후 새로 붙은 대자보 뒤에는 반드시 이전의 흔적이 있다. 이러한 대자보와 스티커의 존재 방식은 그 깨끗하지 않은 얼룩을 무늬로 보게 한다.

그래서 나의 재현은 사라짐의 반대편이 아니라, 사라짐의 안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촬영을 시작할 때 느꼈던, 사라지면 재현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반박하듯, 끈적하고 얼룩덜룩하며 너덜너덜한 흔적은 사라짐이 아니라 남음으로 발견되었다. 그렇게 남은 것들, 그러니까 대상이 존재하는 방법의 핵심을 간직한 결과물은 어쩔 수 없이 관찰자 앞에서 그만의 미학을 드러내는 것일까?

캠코더 앞에서, 찢기고 뜯기고 먼지를 입은 대자보와 스티커의 모든 흔적은 가장 구체적인 대자보와 스티커들의 초상화이자 추상화가 되었다. 이 다큐멘터리 〈스티커와 대자보〉를 찍으며, 누구나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청소되지는 않는 대자보의 존재 방식이 좋아졌다. 그리고 아마 이게 방송영상과 부전공 3년 차에 처음으로 촬영을 좋아하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카메라가 내게 이 모든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렇게 뜯겨나가고 훼손되어도 그게 대자보와 스티커의 좌절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대자보와 스티커들이 딛고 선 조건임을 안다.

©김선진

글 김선진
한예종 예술사에서 미술이론과 방송영상을 공부한다. 방송영상을 부전공하기 시작한 이유는 이곳에서만 사회학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론만을 탐하던 내게 책이나 논문 바깥에서 더 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음을 알려준 방송영상과에 감사를 올리며, 이 글을 학교의 모든 스티커와 대자보들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