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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경계의 무의미함이 갖는 의미 :전시 《중간 지대는 없다》

어떤 예술 작품을 감상한 후 작가의 의도한 바를 찾아볼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작품이 너무 좋을 때다. 내가 느낀 이 ‘좋음’의 이유를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마구 정보를 찾아보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꼈을 때도 있다. 이때는 전자와는 달리 질문이 아닌 ‘의문’이 발생한다. 의문은 질문과 달리 기분 좋게 품고 있기만은 쉽지 않다. 내가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작가가 의도한 바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나? 정말로 이런 표현 방식을 선택한 것이 작가에게 최선이었을까? 아무런 감각도, 메시지도 느껴지지 않는 건 내 취향의 문제인가? 미술관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작가를 초대한 거지?

미간을 찡그리게 만드는 의문이 이어지다 보면 의심의 대상이 나 자신에서 작가에게로, 심지어는 전시를 연 공간과 주체에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텅 빈 벽과 바닥만 있던 전시관은 해결되지 않은 물음표들이 둥둥 떠다니며 뒤섞이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창작자와 향유자, 공급자와 소비자, 관리자와 사용자의 자리를 넘나들게 된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8월 14일부터 시작된 연례전 2025 타이틀 매치1 《장영혜중공업 vs. 홍진훤: 중간 지대는 없다》는 이러한 중간 지대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가 발견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전시 1층은 강렬한 색채의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을 활용한 장영혜중공업의 영상 작업들로, 2층은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한 홍진훤의 사진과 영상 작업들로 구성되어 있다. 두 전시는 여러 시공간에서 발화되어 온 주장과 토론, 언어들의 교집합을 보여주며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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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기획 ‘타이틀 매치’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을 대표하는 연례전으로, 2025년 12회를 맞이하였다. 하나의 주제 아래 두 작가가 펼치는 대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경쟁’의 의미를 넘어서 ‘매치’를 재정의할 수 있는 2인전의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제시되는 시공간은 전시의 주제이기도 한 ‘중간 지대’라는 단어로 갈무리되는데, 과거의 정치적 균열부터 동시대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부조리,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충분히 상상 가능한 미래의 음모론까지 다양한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두 작가는 이러한 ‘중간 지대’라는 테마를 작품 속에 제시하는 데에 있어 상반된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두 작가의 방법론을 비교해 보는 것 또한 관람의 주요 포인트 중 하나이다. 장영혜중공업의 작업은 주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 혹은 미래의 가상 세계 속 내러티브를 말한다. 반면 홍진훤의 작업은 주로 역사 속 과거의 이야기와 동시대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교차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서로 다른 두 작가의 중간 지대 속 시공간을 함께 마주하는 한편, 이들이 작품이 되어 관객에게 제시되는 방법론 사이의 경계 또한 고민해 볼 기회를 갖게 된다.

장영혜중공업, 〈우리는 아름답지만 당신은 아냐 — 근데 괜찮아!〉의 스틸, (2025, 서울시립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북서울미술관 커미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먼저 장영혜와 마크 보쥬로 구성된 아티스트 듀오 장영혜중공업의 작업들을 살펴보자.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아름답고 무심하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름답지만 당신은 아냐 - 근데 괜찮아〉(2025) 속 두 아바타의 말이다. 마치 뉴스 아나운서를 연상시키는, 극도로 표준화된 미의 얼굴을 한 두 아바타는 자신들의 사고 체계가 가진 장점을 기존 인간의 사고에 빗대어 연거푸 나열한다. 이들이 하는 말은 초반에는 인간다움에 대한 칭송처럼 들리지만, 점차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에 대한 조롱으로 바뀐다. 스크린 앞에 가만히 앉아 어떠한 결함도 개성도 없는 얼굴이 내뱉는 조롱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역설적으로 도대체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었다. 내 앞에 있는 저 기계가 내뱉는 불편한 말들이 인간답지 않은 건 알겠는데,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 저들과 크게 다른 것인가? 한시도 쉬지 않고 완벽함을 향해 달려가는 삶, 결함 없는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현대 인류의 삶은 과연 얼마나 더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극도로 이상화된 아바타의 모습에 도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일한 모니터에서 시간차를 두고 재생되는 작업인 〈자기혐오에 빠진 시〉(2025) 또한 유사하다. 텍스트의 화자로 등장하는 여성 아바타는 직장 문제, 부동산에 대한 허황된 꿈, 가족들에 대한 불만 등 현실적인 삶 속 모순들을 몹시 자조적인 태도로 나열한다. 그러나 동시에 은근히 그러한 무기력한 삶을 긍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시를 통해 이를 표현할 줄 아는 스스로를 남들보다 낫다고 여기며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화면 속 아바타의 우울한 자조가 내가 가진 열등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관람객에 불과했던 나는 순식간에 시를 쓴 작가이자 그 시를 읊는 작품 속 아바타와 동일시된다. 의도하지 않은 순간 나도 모르게 작품과 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황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영혜중공업, 〈안녕하세요, 여러분, 우리는 특별해요! 〉, (2025,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커미션) ⓒ김지은

앞선 두 작품과 더불어 다른 작품들이 예술을 통해 관객에게 거울을 비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면, 〈안녕하세요, 여러분, 우리는 특별해요!〉(2025)는 이 모든 느낀 바를 다시 한번 의심하게 만드는 전시의 최종작과도 같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처럼 사회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담아내기보단, ‘예술하는 것’이라는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에 관해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 설명은 결코 유려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앞선 작품들을 통해 ‘예술로 사회를 이해’하려 노력해 온 관객들의 시간과 태도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민다. “우리는 늦잠을 자고, 빈둥거리고, 비를 피하고, 그것이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는 옳은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있어 보이지만 동시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이 문장을 접한 순간 이해가 되지 않는 영화를 보고 나와 시간 낭비였다고 욕을 하던 마음과, 어쩌면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운 마음이 교차하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과연 예술은 정말로 사회에 필요한가? 도대체 예술이 이 복잡하고 난잡해지는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장영혜중공업은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전시를 구성한 본인들 또한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라며 또 다른 의문점을 남긴다. 시간을 들여 전시장에 오고, 도록을 열심히 읽어가며 이해해 보려 했던 이 모든 작품들이 그저 허울 좋은 언어의 나열일 뿐일 수도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 예술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에게 던져진 그 질문이 무엇인지는 관객이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편, 윗층에서 볼 수 있는 홍진훤의 작업은 더욱 직설적인 방식으로 예술과 사회의 경계를 제시한다. 사회와 필연적으로 맞닿아 있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통해, 사진이라는 정지된 기록의 형태가 담론의 바탕으로 펼쳐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흔히들 사진은 ‘순간 포착’이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홍진훤이 말하고자 하는 사진의 역할은 포착되는 순간이 아닌 그것이 사람들에게 제시되어 ‘발견’되는 순간에 있다. 작가는 한 장의 멈춰진 이미지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해석에 따라 수많은 의미가 더해지며 새로운 담론이 펼쳐지는 광장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에 “사진은 내란만큼 세계를 각성할 수 있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과 함께, 국경선과 시간선이라는 가장 큰 물리적 경계를 넘나들며 여러 이미지를 제시하고 이를 관객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장 큰 벽에는 비슷한 크기로 인쇄된 24장의 사진이 두 줄로 나란히 벽을 채우고 있다. 사진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다양한 공간의 시위 현장을 담고 있기도 하고, 역사적 기록물로 촬영된 과거의 모습이 있기도 하며, 이미지나 회화에 가까운 사진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벽에는 “전시된 이미지 중 서로 가까이 있는 두 장의 사진을 골라 나만의 시선으로 해석해 봅시다.”라는 텍스트가 함께하고 있다. 이는 해당 벽에 걸린 사진들뿐만 아니라, 매일 수백수천 개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현대 인류가 능동적으로 이미지를 읽고 해석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담고 있다.

위와 같은 작가의 바람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영상 작품이 바로 함께 전시된 〈합창〉(2025)이다. 〈합창〉은 1942년 히틀러 생일 전야제에서 연주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의 실황으로 시작해, 음악 위로 2005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경찰청고용직노조 고공농성 현장의 아카이브 푸티지가 펼쳐진다. 당시 현장의 격렬한 음성이 수십 년 전 몹시 정치적인 의도로 연주된 음악과 뒤섞이며 발생하는 소음을 통해, 우리는 편집이라는 하나의 예술적 표현 양식이 어떻게 서로 다른 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연결하는 힘을 갖는지 뼈아프게 느낄 수 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창조된 이미지더라도, 역사가 반복된다는 대전제를 관객들이 잊지 않을 때 이들은 얼마든지 경계를 넘어 연결될 수 있다.

홍진훤 <랜덤 포레스트 2025>(2025,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커미션) ⓒ홍철기

한편, 이번 전시가 말하는 ‘경계에 대한 탐구’는 비단 작품 내부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관람객은 작가와 공간이 제시하는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작가와 작품, 작가와 관객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두 전시 모두 관람하는 내내 작가가 관객에게 불쑥 다가와 “이건 이렇게 봐야 해”라고 말해주는 순간들이 잦다고 느꼈다. 장영혜중공업의 경우 한 번에 하나의 영상만을 재생하면서 관객이 정해진 순서대로 스테이션을 이동하며 작품을 감상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홍진훤의 경우 아예 〈랜덤 포레스트 2025 - 인덱스 북〉(2025)이라는 작업 노트의 묶음을 하나의 작업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이 책은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을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사진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이를 읽는 관객들로 하여금 더 많은 맥락으로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만 이렇게 작가가 의도한 대로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은, 완벽하게 관객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순간 기존의 설정된 경계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가령 장영혜중공업의 영상들은 재생되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만, 관객이 공간에 입장하는 순간이 1번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순간이 아닐 확률이 훨씬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관람객이 어떤 순서로 영상을 시청하게 될지, 그 순서가 관람자 개개인에게 어떠한 맥락을 생성해 낼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홍진훤 또한 〈랜덤 포레스트 2025 - 인덱스 북〉이 사진들 옆 별도의 공간에 책상과 함께 비치되어 있지만, 해당 텍스트 분량이 적지 않아 어디를 얼마만큼 읽느냐에 따라 작품 속 맥락에 대한 이해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관객이 작가가 의도한 바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전시장을 나설지, 그들이 관람을 통해 새롭게 생성해 낸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일지, 끝까지 알아낼 수 없는 질문들이 전시장 속 어딘가에 남는다.

“좋은 영화는 관객에게 물음표를 남기는 영화”라는 말이 있다.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후 퇴장할 때 출구 벽면에서 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 물음표가 너무나도 많아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평소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을 극복하고 GV에서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는 한편, 수십만 원을 쓴 게 너무나도 억울할 정도로 최악인 공연도 있는 법이다. 예술은 시간과 돈이라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귀중한 두 재화를 순식간에 소비하게 만든다. 하지만 따뜻한 밥 한 끼만큼 배를 부르게 하지도 않고, 좋은 잠자리와 옷만큼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도리어 기분이 나빠지거나 지치게 만들 수도 있다.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의 경계를 널뛰듯 넘나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번 《장영혜중공업 vs. 홍진훤: 중간 지대는 없다》는 이러한 예술의 특성을 정면으로 드러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가치를 정량적으로 환산할 수도, 미리 가늠할 수도 없는 예술은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고민은 어떤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전시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지만, 앞서 언급한 수많은 경계들이 지워지고 흐려지는 ‘중간 지대’의 공간으로서 관람객이 이 질문을 마주하고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장소가 되어주고 있다.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의문과 질문 사이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이 중간지대가, 다른 이들에게는 어떠한 경험의 공간이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글 김지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공부하고 만들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즘은 손도 머리도 쉬고 싶지 않아서 비즈팔찌를 만들면서 애니메이션을 본다. 다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